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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ㅣ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대작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걸리는 걸까. <태엽감는 새> 이후 일련의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들을 사뭇 못마땅해 하며 청년 하루키쪽을 더 담아두고 싶어 한 나는, 요시다 슈이치가 조금 더 <파크라이프>와 <동경만경>쪽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바, 어느새 (혹은 벌써) '감히 나의 대표작'을 만들어낸 그가 몹시 서운하다. 그의 신작 '악인(惡人)'은 작가 스스로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여기겠다는 자신만만한 문구를 달고 출간되었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2007년 일본 최고화제작'이라는 호화로운 금색의 띠지를 허리에 두르고 있으니, 요시다 슈이치 씨, 이렇게 요란해도 되는 건가요, 하는 괜한 심술에 띠지를 휙 벗겨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한번 어긋난 심보는 삐딱한 시선까지 동반하는 게 당연지사, 읽는 동안에 이게 요시다 슈이치가 쓴 글인지, 혹시 미미 여사의 새 작품인지, 그도 아니면 내용도 대동소이하여 헷갈릴 정도인 한 단어 제목 류의 추리소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색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눈앞에 동경만이 펼쳐진 듯한,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오르는 나선형의 스파이럴 빌딩의 풍경을 선명한 영상으로 떠올리게 했던 그의 섬세한 묘사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극도의 제한된 감정 묘사로 더욱 강한 감정을 뿜어내던 주인공들은? 그의 작품들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색들이 모두 대작 강박증에 빠져 제 빛깔을 잃어버린 것인가 몹시 안타까웠다. 설상가상 앞 장면의 마지막 단어에서 다른 장면의 첫 장면으로 이어지는 꼬리를 무는 방식은 몇 차례 반복되고, 신문연재로 인해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반복 설명하는 방식도 자꾸 눈에 띄어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다행스럽게도 후반에 접어들수록 요시다 슈이치의 색깔이 선명해지고 그의 문체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악인'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요리하려다 그 무게가 조금은 부담스러워 평이한 모양새를 택한 것일까, 혹은 자신의 빛깔을 부러 흐릿하고 평범하게 만든 것일까, 웬일인지 그의 새 작품은 추리소설과 르포가 혼재된, 작가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소설이 되어 버린 듯했다.
여기까지는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들을 몹시 사랑한 나머지, 엄청난 기대치를 품고 작품을 읽은 한 열혈독자의 푸념이었다. 부풀린 기대치의 바람을 뺀 일반 독자로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을 말하자면, 확실히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 '악인'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다루는 주제에서나 분량 면에서 스스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칭할 정도로 스케일이 큰 작품임에는 분명하는 생각이 든다.
별반 새로울 것도 없이, 이야기는 한 여자가 외딴 고갯길 도로변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전날 밤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가 만남사이트에서 알게 된 남자를 만나러 갔다가 살해당한다. 작가는 추리소설의 복선이나 복잡한 장치, 긴박감을 택하는 대신 일찍부터 범인의 윤곽을 드러내고 사건의 면면을 세심히 관찰하듯 전개시켜 나간다. 다각적인 시각에서 범인과 피해자를 둘러싸고 연결되어 있는 주변인들의 상황과 감정을 세밀하면서도 무심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은 충동에 의해 저질러졌을 수도 있는 살인사건이 어떻게 '피라미드의 맨 밑에서 불쑥 돌을 뽑아내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에 파장을 미치고 크나큰 울림을 가져다주는가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날마다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 무수한 말들과 정보들에, 사람들 사이의 혼재된 선의와 악의가, 혹은 그들의 욕망이 투영될 때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되어 속절없는 쓰레기로 변해버리는지 또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짐짓 헛된 죽음으로도 볼 수 있는 사건의 이면에는 쉽사리 재단해버릴 수 없는 많은 복잡다단한 인간들 사이의 감정과 교류, 그리고 순간적인 선택이 얽혀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행실 나쁜' 여자의 '그리 되어도 마땅한' 것이라 내뱉어버릴 수 있는 죽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남은 인생을 내던질 만큼 더없는 슬픔이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무엇이 선과 악인지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만든다. 많은 사람들에게 악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는 피할 길 없는 악인인 것일까, 그녀는 제멋대로 들떠 그 악인과 사랑에 빠진 것일까. ‘악인’이 된 그는 너무 늦게 만나버린 사랑하는 상대를, 그와 같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드는 것으로, 그녀를 향한 마지막 선택을 한다.
누구나가 선량한 표정을 한 채 숨 쉬고 생활하고 있는 바로 이 공간에도 발현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도처에 숨죽인 악의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오싹 소름이 돋는다. 상황과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상대가 최적의 상태를 갖췄을 때 누구든지 악의를 품은 악인이 될 수 있으며 본인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스스로 이 정도는 악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합리화할 것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영웅의 겉모습을 하고, 욕망을 먹이로 힘을 키우는 진짜 악인이 있을지니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 진짜 악인에게 나의 욕망을 먹이로 주며 복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이 더욱 무섭고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