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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ㅣ 접시 위에 놓인 이야기 5
헬렌 니어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가치가 없다'라거나 '들인 시간이 아깝다' 류가 아닌 경우에 리뷰는 일종의 그 책에 대한 애정어린 헌사라고 생각한다. 가슴 속 깊은 곳을 쿵,하고 건드리고 가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읽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물게 하는 책들도 있다.읽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은 '아, 멋진 헌사를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기도 하고 마구 밑줄을 긋고 감동하며 곱씹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그 쿵,하는 울림의 강도가 너무나 강해서, 행복이 차고 넘쳐서 도저히 애정어린 헌사에 손을 못대는 책들도 있다. 내게 있어서는 니어링 부부의 책들이 그러하다. 강도 높은 울림을 겪고도 두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경외감이 너무 커서 감히 허접한 몇 줄의 잡문으로 그들에게 헌사를 바치지 못했다. 해야 할 일임에도 남겨두고 있는 어정쩡한 상태로, 언젠가 책에 누가 되지 않는 헌사를 쓸 수 있기만을 그저 바랐었다. 지금이 그 언젠가는 아니지만 빚을 갚는 심정으로 그들의 올곧은 삶에 작은 헌사를 남몰래 바친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은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삶과 사랑과 생각과 철학이 눅진하게 녹아들어 있는 한 권의 철학적인 요리책이다. 두 사람이 도시의 삶을 접고 '땅에 뿌리박은 삶'을 선택하여, 53년 동안 얕은 미각에 휘둘리지 않고 자연을 느끼고 호흡하며 철학을 바탕으로 한 식생활을 추구했던 기록이다. 과도하게 음식에 노력을 부여하기보다는, 필요 이상 지나치게 음식을 섭취하기보다는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자연에 감탄하고,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악기를 연주하는 데 들일 것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충고한다. 딱히 어느 한 부분을 뽑아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동서양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수한 인용문들은 책의 첫장에서 끝마치는 장까지 속속들이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창자를 창자 속에 묻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기괴한 죄악인가. 탐욕스런 몸이 그 안에 밀어 넣은 다른 동물의 몸을 취해 살찌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 죄악인가. 살아 있는 생물이 다른 살아 있는 생물의 죽음으로 인해 살아야 하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 죄악인가.'라는 피타고라스의 말에 경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육식을 하고 있다. 간간히 패스트푸드점을 넘겨다 보면서 햄버거를 기웃거린다. 책장을 넘기는 시간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 가련하고 힘없는 육체가 혓바닥의 얕은 미각을 부수고 생명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되기를 바란다. 영양소가 과도한 조리로 인해 파괴되지 않은, 소박하면서 든든한 푸성귀와 곡물과 과일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 대신에 얻은 풍요로운 시간들은 정신을 맑게 할 수 있는 음악과 책들에 할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과식을 피하고 육식을 줄이고 간단한 조리법을 선호하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하여 점차 소박한 밥상으로 옮아가려고 한다. 언젠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온 뒤의 당연한 결과로서' 신체가 더이상 시간을 버티지 못할 때 봄날의 미풍을 온몸으로 느끼듯 기분 좋게 건강한 죽음을 맞기를 바란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 또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죽음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