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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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을 좋아한다. 따라서 편향된 평가가 되겠지만 어쩔 수없이 이 단편집도 책장을 넘기는 내내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고 말할 수밖에. 그의 작품들의 화자가 항상 그렇듯이, 어떻게 이 감정을 잡아내 이렇게 드러낼 수 있는가 할 정도의 놀랄 만한 명민함을 지니고 '일상'을, 혹은 환상으로 여겨질 만한 '일상의 벗어남'을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비단 화자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 나오는 대개의 인물들은 평범하지 않을 만큼의 감성으로 세상과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단편집의 인물들도 그러하다. 뜬금없는 전화에서도 상대방의 감정을 화들짝 놀랄 만큼 꿰뚫어 잠언 같은 말을 해주고, 죽음을 눈앞에 둔 병에 걸린 할머니는 식물과 소통을 한다. 몸에 난 조그만 부스럼과도 인사를 나누고 세탁기 뒤에 할머니의 유품인 수정을 키우는 남자도 있다. 중편을 읽을 때 일관되게 흐르는 감정을 따라가며 그저 담담하게 스토리에 익숙해지는 대신, 이 10페이지 남짓한 단편들은, 하나둘 읽어 나갈수록 각각의 이야기가 웬일인지 물방울들이 합쳐지듯이 슬그머니 제 윤곽을 잃고 하나로 뭉쳐진다. 너무도 그 느낌이 자연스러워서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섞여버린다. 그럼에도 각각의 물방울들은 완전함을 잃지 않고 제 모양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마치 가까이보면 의미 없이 대충 찍혀 있는 듯이 보이는 점들이 하나로 모여 빛고운 그림을 만들어내듯이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의 단편들은 그렇게 서로를 잡아당기고 합쳐져 강렬해진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만큼 어느 곳을 펼쳐 한 부분을 뚝 떼어놓고 보아도 그 문장들을 곱씹을 수 있을 만큼 정제된 글이 있을까, 싶은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여지없이 하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검정 호랑나비'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나는 현실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광경을 보면 사람이란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어둠을 처리할 장소가 있으면 조용한 사무실에서 비명을 지를 만큼 절박해지지 않는다.. '다도코로 씨'에 나오는 일부분..

그의 예전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의 '몸'에 새겨진 느낌들처럼, 요시모토 바나나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일부러, 혹은 우연히 잊혀져 버린 기억들이 어느 때, 우연한 계기로 인해 현재의 우리에게 발현되는 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것은 의식이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원초적인 힘을 가지고 기억을 꺼내 지금의 아픔과 반죽하여 치유하고 융합하여 다시 예전의 기억 속으로 돌려보낸다. 또한 현재의 우리의 몸은 언젠가 생겨날 미래의 계기를 준비하며 일상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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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4-1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제목만 보면 <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류의, 일본판 못믿을 과학서적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평소 금붕어님의 페이퍼도 바나나와 글과 흡사한 분위기를 낼 때가 있습니다.
물방울의 비유....멋진데요. 저는 평소 읽고 나면 글 모두가 뒤엉키는 느낌이 싫어서 단편집을 좋아하질 않는데....그 느낌이 근사한 경우도 있겠군요.(아, 그러고보니 예전에 전경린의 '환과 멸'을 읽고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한동안 손을 놓고 있던 바나나의 작품이 다시 읽고 싶어지는 멋진 리뷰입니다.(에구...책욕심은 목까지 차는데 시간과 체력이 받쳐주질 못하니....계속된 좌절 -.-)

superfrog 2004-04-10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이미지가 어데로 가버렸어요?
그래도 진우맘님의 하루는 48시간이라는 루머가 돌 정도로 바쁘게, 알차게 사시잖아요..^^
저도 며칠 아프면서 건강에 대해 절감했답니다..

Laika 2004-04-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이주의 마이리뷰"에 당선되셨네요...
축하드려요....역시......

superfrog 2004-04-19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 안쓰고 버티다가 한번 써 줄까 하고 썼는데 저번주에 보고 꽝이로군 했었는데.. 라이카님, 좋은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후와.. 신난다.. 헤헤

nugool 2004-04-19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 보니 역시 당선 될 만한 주옥같은 감상문입니다. 저책, 꼭 읽어 봐야겠어요! 또 한번 당선 축하!!! ^^

chaire 2004-04-20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모토 바나나를 닮은 차분하고, 따뜻하고, 명민한, 좋은 글이네요.. 저도 축하^^

마태우스 2004-04-2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님이 제 서재에 오셨을 때, 이렇게까지 훌륭한 분인 줄 미처 몰랐었어요. 진작에 좀 잘해드릴 걸 그랬다 싶네요^^. 축하드립니다!

superfrog 2004-04-2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ugool님 주옥이라뇨, 님이 만드시는 비즈공예 재료보다 못난 글입니다요.. 운좋아 뽑힌거죠..;;
카이레님, 얼마나 감탄을 하며 님 글을 읽고 있는데 그런 과찬을 하시다니.. 축하만 감사히 받을래요..^^;;
마태우스님, 님 장난치시는 거 익숙해요..;; 아무튼 감사..^^

hanicare 2004-04-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랑비에 촉촉히 젖어들듯이 올리신 리뷰에 끌려들었습니다.내 생각에 바나나는,충격적인 단절을 맛본 사람들에게 설명없이 흡수되지 않을까 싶습니다.저항없이 벗겨져 아무런 껄끄러움 없이 위장으로 넘어가는 바나나라는 필명은 그녀의 유머감각이 아닌가 싶어요.아니면 강팍한 삶에 대한 위로이든지.

superfrog 2004-04-2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nicare님 반갑습니다..^^ 리뷰 덕에 좋은 분들을 야금야금 알게 돼서 하하! 즐거워요..
님 코멘트를 너무 잘 쓰셔서 제 리뷰가 부끄러워요.. '충격적인 단절을 맛본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구구절절한 하소연 없이도 받아들여진다는 게 참 힘들고도 부러운 점이더군요..^^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2004-04-2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8-26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8-2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감격해 하고 있답니다. 저도 첨이에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