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구판절판


발이 시렸다.-7쪽

곧 사월이 오리라. 아니, 오직 사월의 첫 보름만이 찾아오리라. 그조르그는 가슴의 왼쪽 한편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월은 이미 그에게 시퍼런 고통으로 다가왔다.-27쪽

속옷을 널곤 하는 창밖 안마당의 철삿줄에 셔츠가 하나 걸려 있었다.
"네 형, 메힐의 셔츠다."
아버지는 마치 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조르그는 형의 셔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뽀얀 셔츠는 바람에 나부끼며 물결을 치다 마치 그 안에 영혼이라도 들어 있는 듯 경쾌하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형이 살해된 날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나, 마침내 그의 어머니가 그날 형이 입었더 셔츠를 세탁해 널었던 것이다. 일 년 반 동안 피로 얼룩져 있던 그 셔츠는 카눈이 지시한 대로 피의 회수를 기다리며 그의 집 위층에 걸려 있었다. 핏자국이 누렿게 변색되기 시작하면 망자가 아직 복수를 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징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30쪽

날은 아침 나절처럼 여전히 어둑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인처럼 시간을 어림잡을 수 없었다.-57쪽

그는 마치 자신의 웃음이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댄 성냥불이라도 되어 그것을 꺼뜨려야 할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127쪽

"저 사람은 며칠 전에 살인을 저지르고, 오로쉬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디안은 차창에서 눈길을 떼지 ㅇ낳은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들었어."
청년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않은 채, 열에 들뜬 눈길로 젊은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67쪽

"그토록 먼 곳에서 온 명령에 따라 죽음으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거인 같은 의지가 필요할 거야. 실제로 그런 명령은 때론 이미 죽고 없는 세대들을 포함하여, 실로 아주 먼 곳에서 오기도 하니까."-172쪽

그녀에게서 뗄 줄 몰랐던 그의 눈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낯선 여인이여, 나는 이곳에 단지 얼만간만 살다 갈 겁니다!'
남자의 눈길이 그처럼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던 적은 결코 없었다. 죽음이 근접해 있었기 떄문일까, 아니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던 청년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이제 그녀는 차창에 부서진 두세 방울의 빗방울이 그의 두 눈에서 떨어진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헀다.-179쪽

좀더 강해지긴 했지만 아침 햇살은 그것이 유래한 머나먼 출발지의 싸늘한 냉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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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반어법 지식여행자 4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8년 4월
품절


카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마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시마도 카챠에게 똑같이 했다.
"일본어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 싱싱한 미인'이라는 말이 있어. 관능적인 매력이 넘치는 여자를 보고 하는 말이야."
"하하하, 우리도 기껏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100쪽

"아아, 신이시여! 이거야말로 신이 내려주신 천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기 수려한 용모의 신동이여! 나는 감동에 겨워서 떨림이 멈추지를 않는구나."
카챠와 시마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봈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이다. 쉰 목소리와 인토네이션도 똑같았다. R도 프랑스어처럼 가래가 섞인 것 같은 R이었다. 기세등등하고 어딘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올가의 욕설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지아와 핏줄은 연결되어 있을 리가 없지만, 틀림없이 올가의 딸이라고 시마는 생각했다.
올가의 모든 것이 반어법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희극을 연기하는 것 같은 의상과 화장, 그리고 언동은 그 뒷면에 있는 참혹한 비극을 호소하고 있었던 걸까.
"뭐? 다시 한 번 말해보렴, 거기 있는 천재 소년이여! 제 생각에는......이라고! 흥, 칠면조도 생각은 참신하단다. 하지만 결국 수프 국물이 되어버렸지만. 알았니?"
또다시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에 깨달았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은 비극을 호소하고 있었더 것이 아니라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을......-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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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핑 뉴스
애니 프루 지음, 민승남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3월
구판절판


"이봐, 언제 한번 놀러 와. 연락 자주 하세." 파트리지가 말했다.
그들은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깊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듯 공중에서 맞잡은 손으로 펌프질을 해댔다.-25쪽

옛날 상사병에 걸린 뱃사람은 낚싯줄로 느슨하게 '진정한 연인 매듭'을 만들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냈다. 매듭이 느슨한 상태로 되돌아오면 그 관계는 제자리걸음, 단단하게 묶여서 돌아오면 사랑이 맺어지는 것, 매듭이 뒤집혀서 돌아오면 배를 타고 떠나라는 무언의 충고였다고 한다.-27쪽

"(...)그러고 보면 불행은 여럿이 함께 나누는 게 좋다는 옛말이 일리가 있어요. 주위 사람들이 함께 죽으면 죽기도 한결 쉬워지는 거 아니겠어요?"-317쪽

그들의 침묵은 늘 편안했다. 둘 사이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상처 입고 뒤틀린 사랑은 아니었다. 평생 단 한 번 오는 사랑은 아니었다.-332쪽

쿼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센 바람 속에서 수십억 개의 눈발이 춤추듯 맴돌며 떨어져 내렸다.
"계모의 입김이야." 빌리가 말했다.-380쪽

쿼일은 페틀에게서 받은 유일한 선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페틀은 쿼일이 준 여남은 개의 선물 포장을 풀었다. 터키옥 팔찌, 열대어 어항, 카나리아 색깔 눈과 무대 의상에 다는 반짝이 입술의 엘비스 프레슬리 얼굴을 수놓은 조끼. 그녀는 마지막 포장을 풀고 나서 빈손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쿼일을 흘낏 보았다.
"잠깐만." 그녀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냉장고 문 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나왔다.
"당신 선물을 살 시간이 없었어." 그러곤 꼭 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을 펴자 양 손바닥에 갈색 달걀이 하나씩 있었다. 쿼일은 그것들을 집었다. 차가운 감촉. 그는 페틀의 행동을 다정하고 멋지다고 여겼다. 중요한 건 달걀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가 손으로 건넨 선물이라는 상징성이었다. 그에겐 그것으로 족했다. 그 달걀이 어제 슈퍼마켓에서 자기가 산 것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페틀이 자신의 속마음을 아는구나 생각했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건 선물을 주는 마음, 선물을 건네는 손길이라는 걸 알 만큼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어.-393쪽

"하루는 그녀가 내게 달걀 두 알을 줬어요. 날달걀을 선물로 준 거지요." 그떄 쿼일은 그 달걀로 오믈렛을 만들어 어미 새가 새끼를 먹이듯 페틀에게 떠먹였다. 그리고 달걀 껍데기는 종이컵에 넣어 부엌 캐비닛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도 그 자리에 있으리라.-429쪽

4월의 바다에 마치 살포시 미소 짓듯, 혹은 레이스 식탁보를 탁 펼치는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듯 흰 포말의 줄무늬가 보일 뿐 쿼일은 나타나지 않았다.-437쪽

자정이 되자 바람은 서쪽으로부터 곧장 불어오고 신음 소리가 통곡 소리로 높아졌다. 바람의 목록에도 들어있지 않은 지독한 바람. 무시무시한 강풍 블루노더와 블라스트와 랜드래시의 친척. 한가운데가 불그레한 작은 구름으로 시작되는 불스아이 스콜의 사촌. 북유럽의 전설에도 등장하는 뉴잉글랜드 해상의 사흘간의 동북풍 빈드그니르의 시어머니. 알래스카의 윌리워와 아일랜드의 도이니온의 아저씨. 러시아의 눈으로 유고슬라비아의 평원을 강타하는 코샤바, 슈테펜빈트,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스텝 지역에서 불어오는 부란, 크리베츠, 시베리아의 비우가스와 푸르가스, 북러시아의 미아텔의 이복자매. 그냥 북풍이라고도 불리는 캐나다 프레리에 휘몰아치는 블리자드와 그린란드의 얼음평원을 달리는 피타라크의 친형제. 이렇듯 어마어마한 세력을 지닌 저 이름 없는 바람은 예리한 칼날처럼 바위를 깎아냈다.-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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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3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구판절판


(천명관 낭독 부분)
생각해 보시라. 십만 인파가 뜨겅누 여름날 한데 엉켜 땀을 흘리고 그 땀 냄새가 류진의 거리를 날아다니다가 발효되어 온통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상황을 말이다. 십만 인파가 입에서 나는 악취까지 섞인 이산화탄소를 품어대고, 십만 인파면 이십만 개의 겨드랑이, 그 가운데 육천 개가 암내를 풍기는 겨드랑이였고, 십만 명이면 십만 개의 항문이 있으니 십만 개의 항문 가운데 최소한 칠천 개의 항문이 방귀를 뿜어대고, 항문 한 개가 방귀를 한 번만 뀌라는 법도 없잖은가. 방귀는 사람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동차와 경운기도 당연히 방귀를 뀌어댔다. 천천히 몰수록 자동차의 배기가스도 늘어났지만, 자동차는 회색 가스를 목욕탕의 수증기처럼 뿜어대니까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경운기의 경우는 건물에서 화재가 난 것처럼 시커먼 연기를 토해내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130쪽

사람의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 향하면서도 저녁노을이 비추는 생활을 그리워하고, 다른 두 사람은 향락을 추구하지만 저녁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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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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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울어라"
말을 마치자마자 이란의 울음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광두와 송강이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처절함이 극에 달한 날카로운 울음이었다. 그녀는 마음껏, 마치 그녀의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울어젖히는 듯했다. 곧이어 송강이 손을 풀자 입 안에서 맴돌던 울음소리가 '왕'하고 터져 나왔고, 이광두도 따라 마음껏 울기 시작했다. 그들의 방성대곡이그들의 걸음과 함께했고, 시골길을 걷고 있었기에 그들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논밭은 광활했고, 하늘은 높고 아득했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 그들은 한 가족이었다. 이란은 마치 하늘을 보는 듯 고개를 쳐든 채 목 놓아 통곡을 했고, 송범평의 부친은 허리를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마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땅에 심듯 울었다. 이광두와 송강은 눈물을 한 번 또 한 번 훔치며 송범평의 관 위로 눈물을 흩뿌렸다. 그들은 그렇게 마음껏 울었고, 그들의 폭발적인 울음에 근처 나무에 앉아 있던 참새들이 마치 물보라처럼 놀라 날아갔다.-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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