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와 프리즘 - 반양장
이윤기 지음 / 생각의나무 / 1998년 11월
구판절판


내 서재에 있는 9백 권의 장서 중 7백 권은 내가 쓴 책이다. 나는 실패한 저자가 되었지만, 이로써 독자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행복하다. (Thoreau)-44쪽

감히 말하거니와 이 [인간의 상징]은 나의 2,30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했던 책 두 권 중의 하나다. 다른 한 권의 책은 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118쪽

시인 이문재는 신화를 두고 '오래 된 미래'라고 쓴 적이 있다. 그렇다면 신화는 '예스터모로우'인가? '어제의 내일'인 것인가? '내일의 어제'인 것인가? 수수께끼 같은 그의 표현이 내게는 문득 또 하나의 막막한 그리움이 된다.-137쪽

말과 글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말과 글을 통해 그려진 것은, 설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단 유포되면 닦을 수도, 거두어 들일 수도 없다. 바로 말과 글이 지닌, 이러한 마법과 같은 기능 때문에 말과 글의 약속인 철자를 뜻하는 '스펠(spell)'이 '마법(spell)'과 동일한 철자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191쪽

나는 스스로 서양 미술사에 대해 그렇게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부인의 작품인가요, 하고 물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영문학 교수가 나보다 한 수 위라고 믿는다. 나는 따지는데 그는 즐기지 않는가.-210쪽

나는 여행할 때 한잔하는 것을 좋아한다. 기차에서, 특히 비행기에서 한잔하는 것을 좋아한다. '취하다'가 '깨다'의 반대말이라는 것을 나는 매우 의심한다. 나는 약간 취한 상태로 깨어 있는 것이 좋다. 서쪽으로 여행하는 경우, 지기 싫어서 미적거리는 듯하던 해가 마침내 지평선을 장렬하게 넘어갈 때, 또는 하늘의 운평선 뒤로 잠길 때 나는 그 비장하게 아름다운 색깔에 한잔을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219-220쪽

'정신의 사정(射精)'이라는 말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독수리는 교합한 상태에서 날개를 접고는 고공에서 떨어져 내린다던가? 그 아득한 높이에서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도중에 수컷은 사정을 한다던가?-227쪽

좋아하면 자주,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전문가가 된다. 좋아하는 일의 전문가가 되는 길, 골드칼라로 통하는 고속도로다.-246쪽

자, 외국인들에게 '동해(East Sea)'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면?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이름에는, 우리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방위 개념이 들어 있을 뿐, 보편적인 지역 개념이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르는 일본인들을 탓하기에 앞서, '아뿔싸, 우리 생각이 짧았구나', 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조선해'라고 부르자는 독도 박물관의 이종학 관장의 주장이 일이 있어 보인다.-252쪽

서점에서의 작은 사치는, 서점에다 십일조를 바치는 서음성(書淫性) 애서가들의 성감대일 터...-285쪽

[세설신어]는 5세기 위진남북조 시대의 소설가 유의경이 쓴 짧은 글 모음이다. -302쪽

한 민족이 사라져 갈 때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추는 것은 상류 계층의 정체성과 그 민족의 문학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인류학적 사실이다.-307쪽

"그의 글은 간명하고 재미있다. 왜 재미있는가? 그는 인문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다. 인문적 소양만 풍부하면 글이 재미있는가? 인문적 교양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는 독자에게 친절하다. 왜 친절한가? 독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글은 왜 간명한가? 경제학의 진화 과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정밀하기 때문이다."-312쪽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니 세월이지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흐르는 세월에다 임의로 새긴 눈금에 지나지 않는 것인 만큼 그렇게 크게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제야의 종이 울리는데도 못다한 일이 있으면, 남의 나라 시간대를 좀 빌려 쓰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음력 설이 있다. 설을 쓰는데도 안 된다면 7월에 시작하는 회교력도 있고, 10월에 시작하는 유태력도 있다.
오늘은 여생의 첫날...... 날마다 좋은 날이 되면 그 뿐이다.-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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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이청준 문학전집 장편소설 4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내 탓이다.

제목이 <당신들의 천국>이라 내 청춘에 방영됐던 인기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처럼, 이 소설이 그 시대 청춘소설인 줄만 알았으니. 역시 무지의 산물은 놀라워라. 예상치 못했던 소재라 심장이 약간 쿵쿵쿵.

아. 아는 만큼 보이는구나. 그들은 어릴 적 내가 동화책에서 읽었던, "보리밭에 숨어 있다가 어린애들 간을 빼먹는" 도깨비 같은 사람들은 당연히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상상도 못할 만큼 한과 외로움이 서린 사람이더라. 머리로는 한센병이 '천형'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신들의 천국>을 읽으니 조금은 "당신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나 할까.

소설은 쉼없이 읽힌다. 울타리가 둘러쳐진 그들만의 천국. 그곳이 정말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한센병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잘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은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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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이청준 문학전집 장편소설 4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7월
절판


윤해원은 자기의 병을 약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작자였습니다. 그의 병력이 세상을 저주하고 증오하게 만들어갔고, 거기서 그는 오히려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고 있었단 말씀입니다.-210쪽

너의 얼굴에 분홍으로 고운 꽃얼룩은
아무도 꽃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젠 꽃이라 말할 수 없다.
너의 그 그리운 색깔을 위해
우리가 흘린 눈물이 낙화가 되었다면
누이여, 우리는 지금쯤 꽃길 위를 걷고 있으련만......-212쪽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이 진짜 천국일 수는 없습니다.-402쪽

아무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 울타리보다도 더 높고 안전한 울타리는 없을 것입니다.-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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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시종일관 불쾌하고 불편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은 뗄 수 없다. 그저 "롤리타 되게 야해."라는 항간의 얘기만 들었었는데, 정작 읽고 나니 야하기 이전에 몽롱하고 아름답다. 물론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면 한없이 야하다.

아. 롤리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순진한 그 시대 사람들 의견 분분했겠지만, 그렇게 열에 들떠 롤리타 타도하자 어쩌자 한 것도 실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데 당황했기 때문일 것. 천인공노할 연쇄살인범인데 막상 잡아놓고 보니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꽃미남이어서 세상사람들 모두 당황하는 꼴이다. 이걸 절대 용서하면 안 되나, 아름다우니 봐줘도 되나? 물론 절대 용서못할 중범죄지만, 그래도 어쩌랴, 사람들은 이미 꽃미남 살인범에게 홀딱 반해버렸는걸.

나는 <롤리타>에 반했다. 윤리와 도덕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모닥불에 얼굴을 묻고서라도 <롤리타>를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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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절판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15쪽

갑절의 바닐라에 뜨거운 초콜릿까지 얹은 셈.-69쪽

내 뜨거운 솜털 같은 연인아.-78쪽

저기 오른쪽 구석에서 축 늘어진 채 거의 쭉 뻗고 누운 십대의 소녀, 롤라는 먼 옛날의 사과를 와작와작 먹으며 즙 사이로 노래를 했고 슬리퍼를 떨어뜨리고 맨발로 소파 왼쪽에 쌓인 낡은 잡지 더미에 발뒤꿈치를 문질렀다.-83쪽

나 자신이 대견했다. 미성년자의 육체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열정의 단 꿀을 훔친 것이다. 정말이지 털끝 하나 해치지 않았다. 마술사는 어린 숙녀의 하얀 지갑에 우유와 벌꿀과 거품 이는 샴페인을 쏟아부었는데, 보라 그 지갑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내 수치스럽고 열렬하고 죄 많은 꿈을 오묘하게 만들었다.-87쪽

그녀는 마치 재능도 취향도 없고 일상의 삶에서는 지극히 천박하면서도 곡조에서 음 하나만 틀리면 악마 같은 정확성으로 당장에 짚어내는 음악가와 같았다.-117쪽

페르시아인들이 말했듯이 잠은 꽃이오.-175쪽

내게 다만 한 가지 이룰 수 없는 불만이 있다면 내 롤리타를 완전히 뒤집어서 그녀의 어린 자궁, 알 수 없는 심장, 진주 빛깔의 간, 포도송이 허파 그리고 두 개의 귀여운 콩팥에 실컷 키스하지 못한 것뿐이다.-225쪽

그녀는 솟구치는 호기심으로 어둠침침한 험버랜드로 들어왔다.-226-227쪽

그녀의 숨결은 씁쓸하고 달콤했다. 그녀의 갈색 장밋빛 뺨에서는 피맛이 났다.-326쪽

찾습니다, 찾습니다. 돌로레스 헤이즈를.
머리는 갈색이고 입술은 진홍색.
나이는 오천삼백 일.
직업은 없어요, 아니면 <작은 스타>랄까.-347쪽

미국의 교외에서는 외로운 보행자가 외로운 운전자보다 눈에 더 잘 띈다는 것을 잊고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론 거리, 342번지를 다소곳이 걸어갔다. (in concord)-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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