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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 (Hardcover, Compact Disc)
madonna / Grand Central Pub / 1992년 11월
평점 :
품절
종종 아내는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내가 한 영화에 빠져 있는데 옆에서 아내가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했다. 국어 선생이라서 그런지 고비마다 핵심을 뽑아서 딱 한 마디를 던지는데 맥이 확 풀리고 화가 났다. 와신상담하고 있다가 마침 내가 본 영화를 아내가 재미나게 보고 있었다. 천우신조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내 나름대로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쓱 던졌는데 미동도 하지 않는다.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스포일러를 아는 게 더 좋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아내의 설명은 이랬다.
아내는 평소 셀프 스포일러를 즐긴단다. 즉 영화를 보기 전에 다른 관람객의 리뷰나 줄거리를 읽고 나서 보면 더 재미나단다. 줄거리나 결말을 미리 알면 그 장면이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되는지 궁금해서 영화 볼 맛이 더 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흘린 어설픈 스포일러 따위가 아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리가 없었다.
아내는 단팥빵을 즐겨 먹는 나를 두고 촌스럽다고 흉을 본다. 내가 제과점에 갈 때마다 “거 촌스럽게 단팥빵만 사지 말고”라는 말을 꼭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 제과점에 다녀온 아내가 웬 단팥빵을 사 왔길래 이때다 싶어서 버럭 “촌스럽게 단팥빵을”이라고 놀렸더니 돌아온 아내의 대답이 이랬다. “내가 먹으려고 산 것이 아니고 당신 먹으라고 샀지!”
백만 년 만에 아내가 서재에 들어와 내 책을 살펴본다. 너무 커서 책장에 둘 수 없어서 서재 바닥에 둔 사진집을 펼친다.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큰 사진집일 터이고 우리나라에서 한 권 밖에 없을 테니 아내 눈에도 사진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더구나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촬영한 사진집이니까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천천히 사진을 감상하던 아내가 나를 지긋이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진 좀 오려가면 안 돼? ‘십수 년 동안 소중히 간직하던 사진집을 오려가겠다니 기가 막힐 수밖에. 간신히 진정하고 이유를 물었다. 아내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랑했다. “벽에 걸어두게”
자칫하다간 아내 바로 옆에 꽂혀 있는 마돈나(80년대를 주름잡던 그 가수)의 관능적인 사진집 <sex>와 일본의 변태적인 에로티시즘을 대표하는 노부요시 아라키의 사진집으로 눈길이 옮겨갈까 봐 무서워 차마 거절을 못 하고 한참이나 엉거주춤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