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날다 - 우리가 몰랐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혹한 실상
은미희 지음 / 집사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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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에게 잡혀온 뒤로 자신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몸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내일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시간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저들의 소유였고 재산이었고 부품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언젠가 쓸모없으면 폐기처분되고 말 소모품. 소모품에게는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치나 존엄성은 부여되지 않았다. 인간이면 안 되었다. 사람이면 안 되었다. 아이들은 그것들 가운데 하나라도 원하면 안 되었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은 더미였고 마루타였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몸뚱이뿐이었다. 말 잘 듣는 몸뚱이. 말귀를 알아듣는 몸뚱이. 시키는 대로 하는 몸뚱이.(p.106~107)

하지만 고향에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곳은 가서는 안 될 금단의 땅이었다. 이름도 숨기고 고향도 숨기고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유령처럼 살아야 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순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말을 아끼며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혹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해야 할 것이다.(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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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 드로잉에 담은 도시의 시간들
이종욱 지음 / 뜨인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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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의 역사와 함께 빚어진 이 도시는 35년 일제강점기 동안 근대화란 명분하에 일제의 입맛대로 변경, 확장되었다. 이렇게 식민지화와 근대화가 뒤죽박죽된 서울시는 해방과 함께 다시 본래 주인에게 떠넘겨지듯 되돌아왔다. 기쁨도 잠시, 조국은 분열되었고 곧이어 전쟁이 발발했으며 서울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 이후 권력을 잡은 정권은 서울의 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했고, 일제가 구축한 기존 구조와 조직에 순응하거나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권력 중심주의적으로 도시를 뜯어고치기도 했다. 그렇게 수정된 도시 구조는 훗날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기도 했지만 도시 발전과 확장을 제한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p. 316)

심상지리(심상지리, Imagined Geographies)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속의 지리적 인식‘이란 뜻을 지닌 이 개념은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서구중심의 왜곡된 사고를 비판할 때 주로 쓰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심상지리가 있다.(어찌 보면 이 책 자체가 내가 품고 있는 서울의 심상지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적 심상지리는 직접 다녀간 곳, 살던 곳, 머물던 곳 뿐 아니라, 각종 서적과 매체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마음속에 인식하고 있는 장소에는 각각을 대표하는 시대성이 있을 것이다. 보통 한 장소(도시, 동네)에서 한 시절 진득하게 머물다 떠나버리게 되면 자기가 머물던 시대와 그곳에서의 일들, 자주 보던 경관을 개인의 심상지리에 그대로 반영한가.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이르는 장소의 역사와 비교해볼 때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일부분만을 인식하고 있다 하여 문제될 건 없다. 다만 개인적 경험의 한계에서 시대성을 좀 더 넓게 확장하고 싶다면 우리는 장소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한데 도처에 흥미롭고 주위를 끄는 것들이 너무 많은 오늘날, 도시 그리고 동네의 역사에 도통 관심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무작정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비교적 가볍고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도시 걷기 덕분에 장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길 것이고, 그러한 애정은 장소의 역사로 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장소의 역사를 알게 됨으로써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며, 다시 그러한 경험은 개인의 심상지리의 지평을 넓혀 줄 것이다. (p.319~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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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창비시선 500
안희연.황인찬 엮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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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한 생각



김용택

어느 날이었다.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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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
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
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
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
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
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
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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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시그널
브리스 포르톨라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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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이메일도 휴대폰도 없었어요. 제가 휴대폰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들이 휴대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21세기의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몽골 최북단 지역은 무척 고립된 곳인 만큼 모든 일이 매우 천천히 일어난답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 곧바로 생각했어요. ‘이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

"이곳에서 살려면 몇 가지에 익숙해져야 해요. 게르에서 산다는 건 그런 것이죠.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어요. 바람이 들이치고 겨울이 길거든요. 겨울이 일곱 달이나 계속되고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내려가요. 그런 날씨에 순록과 온종일 밖에 있어야 하죠. 눈이 부츠 안으로 들어와 발이 얼어버려요.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온기가 추위를 보상해준답니다. 와이파이가 없어서 사람들이 대화를 더 많이 나눠요…… 이곳 사람들은 삶의 지혜가 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연장자를 존중합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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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8-26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몇 문장만 읽어도 감동이 밀려오네요. 사람의 온기와 대화의 가치...관심가는 책이네요. 감사합니다.^^
 
살아보니 행복은 이렇습니다 - 먼저 살아본 30인의 행복론
박완서 외 지음, 김승연 그림 / 디자인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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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할 것이니, 그래서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명제도 성립하는가 보다. 죽음을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이라 하며 불가에서는 입적, 열반涅槃이라 한다. 인간의 종언에 대해 그렇듯 품위 있고 존귀한 단어를 쓰는 것은 고달픈 생의 의무를 마친 데 대한 위로이고 존경일 것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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