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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시티 -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
케빈 브록마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평점 :
아무런 정보 없이 고른 책..때론 이렇게 골라 읽은 책에서 보석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이 그랬다. 죽은 자가 산자의 기억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곳, 시티의 이야기다. 환경생물학이 전공인 서른둘의 로라는 코카콜라의 프로젝트를 위해 두 명의 탐사대원과 함께 남극으로 간다. 그곳에서 조난당한 로라는 혼자 살기위해 애쓰며 그동안의 기억의 실타래를 푼다. 한편, 동시에 지구에서는 정체모를 바이러스가 퍼져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오로지 로라의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시티에서는 두 번째의 생 아닌 생을 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얼마 전에 읽은 <네크로폴리스>와 <로드> 그리고 주인공의 느낌으로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떠올렸다. 스토리로만 보자면 그렇게 신선하지는 않았다. 다만 행간의 의미를 오래도록 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작가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자신의 생에서 기억나는 사람을 적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상대는 나를 알지 못할지라도 어떤 아주 사소한 한 면이라도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적을 수 있다. 실제로 연락은 하지 않지만 자주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내 인생의 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와 내 인생은 적게나마 공유된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 로라의 지나간 사랑 루카와 절친한 친구였던 미니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들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웬만한 연애나 사랑의 장면이 소설에 나와도 콧방귀를 꼈는데 이 둘의 사랑은 다르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정말 제대로 알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미니의 사고는 나와 흡사했다. 더군다나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공유하지 못한 과거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랑 앞에 자신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죽음을 통해 과거로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루카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죽음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시티에서나마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미니를 축복해주고 싶다.
로라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시티도 사라지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 동안 어딘가에 숨어있던 나 자신의 기억과도 여러 번 마주하게 된다. 적어두고 싶은 문장도 많이 찾아냈다. 이 작가의 책이 더 많이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이하 책에서 옮긴 문장들
누군가를 정말 제대로 알 수 있는 시간이 자신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자기는 겨우 30대 초반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새로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과거를 완전히 알고 있지 못한 경우에는, 머지않아 그 사람이 자신의 지나온 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마련이었고, 그때부터 그녀는 슬퍼지기 시작했다. 이미 그에게 너무 많은 일이 생겨버렸고, 그녀가 그 모든 것을 따라잡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다는 느낌이 아프게 다가왔다. 지금까지의 삶이 온통 기억이 되어버린 누군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그녀를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 그녀 생각에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혹은 자신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그녀의 삶의 일부가 되어왔던 사람들밖에 없었는데,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이제 거의 없었다. ....
어떤 이들은 사랑이 사람들 주변의 그늘을 비춰줄 수 있는 빛이라고 말했다. 그래, 미니도 사랑은 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뭐?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그녀의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조금도 상황을 개선시켜주지 못했는데, 그게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그녀는 사랑에 의지할 수 없었다. 그건 동전만큼이나 가벼운 것이었다. 죽은 다음, 루카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이 과거를 향해서 열리는 것 같았고, 그제서야 비로소 그녀는 다른 누군가를 그녀 자신 만큼이나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 마침내 그녀의 사랑만으로도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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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 분 동안 손등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머리칼을 그대로 내려 두꺼운 커튼처럼 얼굴을 가렸다. "이러니까 동굴에 사는 원시인처럼 보여."그가 말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는 항상 그런 식으로 - 가장 예상치 못했던 때에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녀를 그런 식으로 웃기지는 못했다. 그 누구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녀를 그 정도로 잘 알지 못했다. 단 한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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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게 사람들이 불면증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의식의 과잉과 삶의 과잉.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녀는 삶이란 의식적 활동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로 지내왔지만, 마음을 먹는다고 잠이 오지는 않았다. 잠이 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이 들든 안 들든 개의치 않는 것, 즉, 의지를 내려놓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