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 있네
그러면 내 스무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단 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그 돌 내 손에 쥐어져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 잡고 살았네
세상의 손을 잡는다는 일
부끄럽지 않은 게 없어서 오늘도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일상의 밥을 짓고
그 자리마다 내 손목은 흩어져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많았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그 돌 내 손에 쥐어져 있네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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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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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소설의 리뷰를 쓰기란 정말로 어렵다. 읽고 난 뒤 어떤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나 느낌으로 남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에 많은 양을 읽을 수가 없어(웬지 모르게 지치는 느낌이었다.) 여러날에 걸쳐 읽었다. 읽다가 생각하다가 노트에 베껴쓰다가 다시 생각하다가 했다. 호수에 기차가 빠져 죽는 할아버지와 호수로 차를 몰고 뛰어드는 엄마의 장면은 너무 강렬하여 아직도 어디선가 우울함이 몰려오는 것 같다. 그런 상처를 업고 살아야하는 운명인 루스와 루실은 실비이모와 함께 핑거본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실비이모가 하는 행동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이다. 이를 견디지 못한 동생 루실은 집을 나가버리고 이모에게서 점점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는 루스는 이모와 엄마를 닮아가며 성장하게 된다. 아이들의 양육권을 박탈하고자 청문회를 열겠다는 동네사람들의 태도는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방치하는 것은 아이들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버젓이 이모가 있음에도 보안관이 집으로 찾아와 루스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 책의 말미에 해설을 보니 안개같은 이미지로만 각인된 이 소설의 많은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루스와 이모가 좀더 적극적으로 살았으면 안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행동이 조금은 무기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요즘에야 비로소 알게 된 나는 그 평가를 유보하기로 한다. 이건 단지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일 뿐이다. 한번을 더 읽고 또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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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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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의 패턴이 어디선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루키가 마라톤을 취미로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거의 30년 가까이 그것도 거의 매일 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고는 놀랐다. 이 정도면 거의 취미를 넘어선 정도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도 몇년전 달리기에 대해 관심을 갖었던 적이 있어서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는 달리기에 대한 사유들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하루키에게 달리기는 소설을 쓰는 정신적 노동을 뒷받침하는 육체적 노동으로 보여진다. 소설을 쓰는 일이 체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몸을 관리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일을 강제적으로 하면 그것은 바로 고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신이 선택한 고통의 경우는 다른 경우다.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은 그 고통에 어느 정도는 중독되도록 스스로의 몸을 변화시킨다.

 그렇게 오랜동안 달리기를 할 수 있으니 당신은 참 의지가 강하군요,라는 질문에 하루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근 30년동안 달리기를 해왔다는 것은 의지가 강한 것의 문제가 아니라고.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싫어하는 행위를 그렇게 오랜시간 할수는 없는 법이다. 성격상 그일이 맞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구력을 요하는 장거리 달리기가 자신에게 맞아서 단지 뛸 뿐이라고 한다.  

 100킬로 미터를 뛰는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는 일화에서는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물론 소위 멍때리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 순간도 많지만, 자아라는 것을 생각지 않고 살 수 없는 의식적인 동물이 인간이다. 하지만 육체가 극한의 고통상태가 놓이게 되면 이 의식이란 것의 힘은 급격히 사그라든다. 하루키는 100킬로를 완주하기 위해 '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라고 만트라처럼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 기묘한 느낌은 경험해본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고 난 뒤 러너스블루(러너스하이와 대조되는 개념)를 겪었다고 한다.  

 급기야는 수영, 사이클, 달리기 세가지를 다 해야하는 트라이애슬론에 까지 출전하게 된다. 끝까지 자신은 '최소한 걷지는 않겠다'라고 말하는 하루키의 말에서 그의 작품에서 풍겨져나오는 어떤 신념같은 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여름에 잡은 오랜만의 하루키의 에세이 덕분에 나도 달리고 싶어졌다. 쓰지 않아 퇴화된 근육들이 이곳저곳에서 움직여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하지만 장마라서 말이지.. (핑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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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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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알게 된 건 지난 겨울에 읽은 박홍규의 책에서였다. 아버지 없이 유년을 보낸 사르트르가 자신의 유년을 철저히 부정하며 자신에 대한 쓴 이야기라는 문구에 혹했었다. 누구에게나 유년은 추억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미화되기 마련이다. 무수히 스쳐간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유년이 차지하는 무게는 그 사람의 온 생애를 좌우할 정도로 큰 역할을 하게 마련인데 이 유년을 부정했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은 크게 '읽기','쓰기'로 이루어져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적 개념이 나와서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수많은 일화 형식으로 씌여져서 때론 전율하며 읽기도 했다. 아버지가 없이 조부모와 어머니와 함께 지낸 사르트르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자기기만을 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설 자리를 입증하고자 열살짜리 꼬마가 책을 읽어가며 때론 글을 써가며 자신을 규정해나간다. 그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욕구때문에 사르트르는 문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현실이 아니라 상상을, 사물이 아니라 말을, 생활이 아니라 허구를 섬긴 병을 해설에서는 '문학병'이라고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사르트르의 상상, 생각들이다. 거의 내깔려쓰다시피 말들이 줄줄이 이어져나온다. 조부의 서재에서 세상의 모든 글을 삼킬 것처럼 독서에 몰입하기도 하고,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소설을 쓰며 신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부조리한 삶일지언정 성실해야한다고 했다. '미래의 시점에서 거꾸로 보기'라는 관점을 취했을 때 지금의 불행 역시 그 의미를 가지며 인과의 사슬로 얽혀 설명이 되고 정당화 된다. 내 인생은 해피엔딩일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불행은 두렵지 않다고 해석하는게 맞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의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이 사람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더 이상 말로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그가 2013년의 독자를 상정하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의 말대로 그는 60kg짜리 종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책을 읽으며 그를 만나고 있다. 그의 뇌를 한바탕 들쑤시고 다녔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역시 그처럼 자꾸 상상과 생각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다.  

 책의 말미에 거장은 자신은 재능이 없는 작가라며 이와 같은 말을 남긴다.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생략)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p.272)

 위대한 저작들을 남긴 최고의 지성은 그 과정들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런 자신은 진정한 인간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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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들 주세요 사계절 중학년문고 2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양혜원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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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언어의 특성중 '사회성'에 대해 이렇게 재밌고 즐겁게 설명할 수 있다니 감탄을 했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고 그 논리에 따르면 닉의 실천대로 '펜'을 '프린들'이라고 바꿔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장난으로 그 단어의 역사가 번복될 수 있을까. 이 동화에서는 프린들이라는 단어가 일파만파 퍼져 결국 닉을 백만장자의 자리 까지 오를 수 있게 해준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다.  

 이 동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는 사전을 거의 숭배하시는 그레인저 선생님이다. 닉의 장난에 괴로워하는 깐깐한 선생님인것 같았는데 이 선생님이야말로 고리타분한 지식을 아이가 실천할 수 있도록 악당 역할을 자처한다. 10년뒤에 닉에게 보낸 새로나온 사전에는 프린들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선생님의 숨은 마음이 드러난다. 아, 이 때의 감동이란.  

 세상에 그레인저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정말 프린들이란 단어가 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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