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의 기도 

 

                                                      남진우      

 

                              

 1

일찍이 한 철학자는

한 바구니의 책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

일용할 굶주림?

굶주림이라면 그것은 내게 너무도 충분하다

아무리 먹어치워도 질리지 않는 탐욕의 눈빛과

어둡게 입 벌리고 있는 머릿속의 허방

허겁지겁 굶주린 눈으로 먹어치우면

글자들은 텅 빈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잠시 북새통을 이루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

책들이 달려든다

화려한 표지를 치켜세우고

현란한 광고 문구와 장엄한 저자 약력을 앞세우고

날 선 종이들이 사방에서 달려와

일제히 내 몸을 베고 찌른다

나를 읽어야 해 나를 읽어달라니까

책들이 아우성치며 내 몸을 타고 오른다

빽빽히 종이로 들어찬 몸이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고

다시 꾸역꾸역 종이를 삼킨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책을 멀리할 수 있는 자만심을 주시옵고

 

 3

매일 한 바구니의 빵 대신

한 가마의 책이 하늘 어디선가 떨어진다

떨어져

오늘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저 거대한 책더미

이를 갈며 아무리 먹어치워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저 글자들의 산

죽은 나무의 무덤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듯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그 끝없는 말의 거미줄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나는 어느덧 살진 거미 앞에 서 있다

 

 4

지금 막 도착한

바구니를 들여다본다

아,

책 대신 누군가 띄워보낸 갓난애가

빙그레 웃고 있다

반가워 들어올리면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종이 뭉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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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레종 데트르 - 쿨한 남자 김갑수의 종횡무진 독서 오디세이
김갑수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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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지 않고 삶의 전반적인 내용을 책으로 접하고자 하는 것이 평생에 걸친 내 책읽기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대단히 큰 즐거움과 희열이 따른다. 삶에서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욕망만 없앨 수 있다면 이런 즐거움으로 한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그런가? 그런 태도 역시 어떤 빗겨 가기, 어떤 회피의 태도는 아닐까?

멋진 남자 김갑수의 책을 이제서야, 처음으로 들여다봤다. 대충 맛만 봐야지 했다가 화들짝 열광하게 되었다. 홀딱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다. 독서에세이류를 많이 읽었는데 이렇게 재밌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김갑수의 머리속 이곳저곳을 헤매이다가 위 단락을 읽고서 깜짝 놀랐다. 내가 전에 했던 생각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꼭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간절한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아니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정말 무엇이 되고 싶어서 간절했던 것이 있나 싶다. 나는 그저 오래된 책이 가득한 동네도서관을 누비며 먼지 냄새를 맡으며 찾아내는 책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 같다. 이런 즐거움과 함께라면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일이 그렇게 재밌지 않아도 이 인생이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경제활동, 소통할 수 있는 몇안되는 친구만 있어도 내 삶은 의미있을 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런 태도 역시 어떤 빗겨 가기가 아닐까. 좌절된 꿈에 대한 나만의 변명은 아닐런지.

글솜씨도 너무 좋고, 무엇보다 수많은 책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만들면서 흐뭇함을 감출 수 없다.

그런데, 정말 목적과 방향없는 삶이라도 괜찮은걸까. 10년후의 나는 이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게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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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 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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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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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 '맛'을 작년에 매우 감명깊게 읽었었다. 아마도 이 책이 내가 읽은 이 작가의 첫 책이었다면 나는 아마 다소 실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맛'에서도 그랬듯이 특별한 줄거리는 없지만 철학적 사유가 녹아든 한문장 한문장을 음미하며 이 소설을 좋게 읽었다. 좋게 읽었다는 것은 물론 재밌게 읽었다는 것과는 다르다. ㅋ

나는 우아하다라는 형용사를 좋아한다. 우아한, 기품있는 삶을 지향하는지라 (물론 실생활은 우아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 작가가 말하는 삶의 우아함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한때는 우아한 건 흰 커피잔에 커피를 담아, 꽃무늬 식탁보가 깔린 탁자에서 책을 보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과는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문화, 예술, 철학을 넘나드는 대화를 하되 돈이나 재테크와 같은 속물적인 대화는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2,3년 사이에 나는 우아함의 정의를 다시 내리게 되었다.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으되, 유치하고 장난스러운 농담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커피마시기를 좋아하지만, 감자탕, 막창도 맛있게 먹고, 부나 학력과 상관없이 마음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삶이야 말로 우아한 것이라고 말이다. 우아함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다르게 보였고, 더 많은 사람들의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파트 수위아줌마와 12살 짜리 꼬마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광경은 흔치 않을 것이다. 자살을 결심한 꼬마가 수위아줌마를 만나 인생이 조금 변화된다는 별 것 아닌 내용이지만, 나는 이 책에서 내 인생의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져야할 태도들에 대해 다시 점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고슴도치는 되고 싶지 않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보다는 들에 핀 꽃처럼 여려보이지만 강인함 생명력을 가진 그런 따뜻한 존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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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빵빵, 파리
양진숙 지음 / 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페이지를 넘겨요!"

이미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 말고, 현재에 머물지도 말고, 페이지를 넘기라고.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는 것뿐이라고.

나는 올해 내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넘겼다. 달콤쌉싸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즈음 이 따뜻한 책을 만났다. 이 책에 등장하는 따뜻한, 다양한 빵들을 생각하며 일주일을 포근하게 보냈다. 빵과의 수많은 추억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빵하나 살 수 있는 여유에 감사하며 파리를 생각했다. 빵들은 생각보다 많은 나의 과거를 장식하는 소품으로 기억되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가끔 사다주던 우유식빵, 한때 절친했던 중1 나의 친구가 처음 알려준 바게트란 빵, 대학교때 친구들과 아침마다 먹었던 **도너츠, 까페라떼 열광했던 시절 늘 함께 먹었던 스콘, 이루말할 수 없는 기억들이 머리 한구석에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갓 구운 빵하나를 건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싶다. 설령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런 마음이라도 늘 간직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족으로, 책이 굉장히 정성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사진도 예쁘고, 작가의 마음도 예쁜 것 같다. 작가의 충만한 파리 생활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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