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반사(茶飯事) 다반사의 사전적 정의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는 뜻이다, 보통있는 예사로운 말을 이르는 말이다 

“항상 먹는 차(茶)와 밥(飯)처럼 ‘늘 있어 이상할 것이 없는 예사로운 일’을 비유하는 말" 일테다.  

신라와 고려때 널리 애용됐던 차는 조선에 들어서면부터 잊혀진다. 잊혀지던 차문화는 18세기로 들어서며 다시 되살아났고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에 의해 그 진가가 발휘된다..

다산이 18년 동안의 귀양살이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1818년 8월 그믐날 강진에서 양성한 18명의 제자들과 계를 만들고 약조한 ‘다신계(茶信契) 절목’에도 차를 채취하고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추사 김정희의 아우 김명희는 1850년쯤 초의 선사에게서 차를 선물 받고 사례로 쓴 시에서 자신이 평소 차를 즐기지 않아 학질에 걸렸으며, 중국에서 들여온 차에 비해 초의 스님이 보내준 우전차는 거의 바라밀의 경지라고 읊고 있다.    

다산정약용 과 추사 김정희는 워낙 알려진 분이고 초의선사에 대해 자세히 보자.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킨 분이다. 그래서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서는 유학()과 시문()을 배우고,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그는 수행생활과 함께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을 펼치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탄압과 함께 쇠퇴한 다도문화를 다시 역사속으로 끌어들였다.   

초의선사는 차에 대한 저술도 활발하게 하였다. 

 한국의 다경(茶經)이라할수있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였다.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차를 알고자 해서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海居道人 洪顯周)에게 지어서 보낸 차의 전문서이다,   동다송의 대의(大意)를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로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시도록 해라. 둘째로 우리나라 차는 중국차에 비교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안차(六安茶)의 맛이나 몽산차(蒙山茶)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로 차에는 현묘(玄妙)하고 지극(至極)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고 한다는 것이다.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지은 차서()인 《다신전()》이 있다. 다신전의 내용은 찻잎따기, 차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을 끓이는 법, 차를 끓이는 법, 차를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라고 말하는 저자 정민 한양대교수는 차에 빠져들게 된 계기를 2006년, 18세기 말의 국내 최초의 다서(茶書)인 '동다기'의 필사본을 발견하면서부터라고 밝힌다. 

동다기(東茶頌)’는 초의선사가 1837년 지은 차 예찬론인 ‘동다송(東茶頌)’에 그 내용이 일부 인용되고, 저자가 다산 정약용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필사본을 조사한 결과 동다기의 원래 제목은 기다(記茶)이며, 저자는 학계에 알려졌던 다산 정약용이 아니라 당대 무관 이덕리(1728~?)가 1785년을 전후한 진도 유배 시절 쓴 것으로 드러났고. 가장 대표적인 전통차 전문서로 꼽혔던 초의 선사의 〈동다송〉보다 발간 연대가 50년  앞선다. 

이덕리는 ‘기다’에서 차의 효능을 자세히 설명하고, 차 사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함으로써 수출을 통해 얻은 수익을 국방 강화에 활용해야 한다는 등을 강조하고 있다.

 

 

몸이 허약했던 다산은 만덕산 백련사에 놀러갔다가 주변에 야생 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이후 다산의 제다법은 다른 사찰의 승려들에게 퍼져나가게 됐다. 

스물네 살 때 당시 마흔여덟이던 다산을 찾아가 차를 배운 초의는 장시 '동다송'을 통해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그리고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전다박사(煎茶博士)'로 불린 초의의 존재를 더욱 빛낸 것은 바로 추사 김정희. 초의차를 접하고 단번에 매료된 추사는 초의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 '반 협박'에 가까울 정도로 차를 얻는 데 몰두했다.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 명문대가 출신의 유림 김정희, 그리고 초의선사....다산 정약용과 다성 초의선사의 나이 차를 뛰어넘는 학문적 친분,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오랜 교우관계 .... 

이들의 활발한 교류속에서는 수많은 일화와 수많은 덕담이 있다.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학과 시학을 배운 초의는 “하늘이 맹자 어머니 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다”고 칭송할 만큼 다산을 존경했다. 실학에 열중하던 다산도 사제관계를 떠나 선과 다도에 몰두하는 초의의 구도자적 자세를 존경했다다산 연구가 차벽이 쓴 다산의 후반생에 보면 초의는 다산초당에서 1810년에서 1815년 사이에 길게는 6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며 배웠다. 다산은 초의를 위해 시를 지었다. 


"축 늘어진 초의와

풀어헤친 민둥 머리에,

너의 중 껍데기 벗겨 버리고

너의 유자의 뼈 드러내었다.

묵은 거울 이미 갈고 닦았고

새 도끼는 무디지 않아서,

이미 밝게 깨치었으나

이것은 곧 제이월(第二月 두 번째 달. 즉 무의미함을 뜻함)이로세"

['경인년 제석에 여러 벗들과 함께 운자를 각자 정하여 짓다' 중 다섯 번째 시 '초의선(草衣禪 ) 



 초의선사는 해마다 봄이면 정성 들여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차가 떨어지면 글을 지어 초의선사에게 차를 채근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초의선사는 유배지까지 찾아가 함께 차나무를 심고 차를 만들고 교분을 나누었다. 힘든 친구를 찾아가 말로 위로하는 대신 차나무를 같이 심는 이 모습은 감동이다. 이 시기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와 함께 생활하며 써 준 시를 보면 그들의 각별하고 돈독한 사이를 알수있다. 
 

스님은 멋대로 마냥 웃고 있으소
마음에 걸림돌 없는 곳이 바로 우리 사는 데라오.
사람 옆의 산새는 부질없이 지저귀다 말다하고
손님 맞은 시내구름, 스스로 더웠다 시원했다 하네.
한 침상에서 다른 꿈 없는 것이 좋기만 한데
같은 음식 먹으면서 다른 속내 있겠는가. <초의에게 주다 贈草衣>

 더구나 추사 김정희는 선과 차가 둘이 아니라는 초의선사의 선다일여(禪茶一如)사상을 깨닫고 그 유명한 명선(茗禪)이라는 글을 선물한다. 명선(茗禪)에서 명(茗)은 다(茶)와 같은 뜻이며 의미로는 선다일여(禪茶一如), 다선일미(茶禪一味)와 같은 뜻이다. 초의선사는 추사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뇌소(雷笑)와 설유(雪乳)라는 차를 달여 한잔 마시자며 슬피 눈물을 적셨다. 뒤늦게 부음을 접하고는 <그윽한 길을 꽃바람이 쓸어 가는데 외로운 달만 어둡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덕리가 쓴 것으로 밝혀진 '동다기'와 이보다 30년 앞선 1755년 지어진 이운해의 '부풍향차보'를 토대로 우선 조선 차 문화 중흥의 시작과 다산과 초의, 추사의 차 사랑을 각종 문헌을 토대로 살펴본 정민 한양대교수,.  

난 이책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돌베개의 한국의 차문화천년 시리즈와 함께 볼 꺼다..복터졌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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