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영조시대 역관 출신 문인 이언진(1740∼1766)

 저항과 아만’ ‘골목길 나의 집’은 연암 박지원의 ‘우상전’을 통해 존재가 알려진 천재 시인 이언진과 그의 작품 ‘호동거실’을 다룬 책이다.  

골목길 나의집은 이언진과 그의 시집 호동거실'을 소개하기 위해 전체를 완역하고 매수마다 작품 감상 및 짧은 평 위주로 수록했다

저항과아만은 '호동거실'의 평설(評說)이다. 전체의 특징과 가치를 논하고 아울러 연암 박지원과 대별되는 새로운 유형의 이단아 이언진을 철저히 분석했다.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신분차별이 당연시됐던 조선시대에 근대적 사상인 인간의 자유와 평등, 다원적 가치와 인간의 자율성을 논한 선구적 인물이다. 26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평생 글쓰기로 사회적 억압과 싸운 치열한 저항가였다" 라고 하며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언진에 관한 책을 잇달아 낸 것은 지식인으로서 글쓰기로 사회의 부조리에 끝까지 저항했던 치열함에 끌렸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박희병교수의  '이언진 3부작'의 마지막 이언진 평전 

  저항과 아만’ ‘골목길 나의 집’만으로는 그의 진면목을 알기는 쉽지않았다.,  그래서 박희병교수의 이언진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쏟은 공력을 실감할수있는 이언진 평전이 반가운 이유다.'호동거실'을 기본 자료로 하고, 연암 박지원이 쓴 전기 '우상전(虞裳傳)', 이언진이 조선통신사 수행 역관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유학자들과 나눈 필담집 '앙앙여향(怏怏餘響)'과 '양호여화(兩好餘話)' 등을 정세하게 들여다봤다

 

 

 

 “나는 늘 우상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음을 늘 한스럽게 생각했다. 또한 그의 문장들은 이미 불살라 버려서 남은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그를 알아주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에 상자 속에 간직했던 것들을 털어 내어 전에 그가 내게 보내왔던 시 몇 편을 발견하고 이것을 빠짐 없이 써서 ‘우상전’을 꾸민다.” 

 연암은 이언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전기를 썼는데, 「우상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언진은 스무 살 때 한학(중국어)으로 역과(譯科)에 합격한 역관이자 천재적인 문인이었다. 영조39년(1763) 그는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면서 지은 ‘바다를 구경하다’(해람편)와 일본사람들에게 지어 준 뛰어난 시로 역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일본에서 동시에 이름을 얻었다.  우상은 여러 번 연암에게 시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연암은 시를 전하는 사람에게 농담으로 그의 시를 보잘 것 없다고 했는데, 그러한 우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암은 우상전을 지었다. 

<<우상전>>은 조선후기 대문호 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 ≪연암집 燕巖集≫권8 별집(別集)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다.   

이언진은 역관으로 조선시대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단인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스물여섯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조선에선 무명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문명을 떨쳤다. 그와 필담을 나눈 일본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저서에 이언진과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그에 대해 일본인들은 “참된 재사”라 평했다

 통신사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의 친선 증진에 기여했다. 통신사 행렬은 대마도를 거쳐 에도(동경)까지 가는 동안 일본 백성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통신사의 파견 목적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의 칩입금지 요청이 주가 되었다. 그후 일본과의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강화와 수호체결, 포로인 쇄환, 대마번의 견제 및 일본국정 탐색,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 등 매우 다양하였다. 한편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동(銅)을 가져와 생필품인 쌀, 콩, 면포(綿布) 등을 가져갔다. 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학술·사상·기술·예술 등을 전하기도 하였다.  지금 한류의 원조격인듯싶다.

짧은 생을 산 데다 병으로 죽기 전 자신의 글을 다 태우는 바람에 그는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긴 작품이라곤 170수의 연작시 '호동거실' 정도밖에 없는, 스물여섯 살에 요절한 이언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워낙 알려졌기에, 여섯명이나 되는 작가가 그의 전기를 지었다. 그 가운데 그를 만나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남긴 시와 전해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암중모색하며 그의 모습을 재구성해낸 것이다. 

<< "파리한 모습에 손가락이 길었다."   "총기가 세상에 뛰어나,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먹고 자는 것까지 잊었다. 다른 사람에게 귀중한 책을 빌리면 소매에 넣어가지고 돌아오면서,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길 위에서 펼쳐 보며 바삐 걸어오다가 사람이나 말과 부딪치는 것도 알지 못했다">>라고 그들은 이언진을 평했다 

나는 남들이 하는 것은 따라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고수한 혜환 이용휴(李用休.1708-1782)의 제자인 이언진.  

그래서 이언진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개성적인 시인이 된것일까?

이언진의 스승 이용휴는  18세기 연암 박지원과쌍벽을 이룬 문단의 거장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실학파의 중심인물인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노긍, 심익운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천재로 불린 실학의 대가 18세기 대표적 문인인  금대 이가환(李家煥.1742-1801) )의 아버지로 성호학파의 대표적 문인이다.  

창강 김택영과 다산 정약용은 각각 《소호당문집》권2와《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권15에서 그의 문학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주요 작품에 《혜환잡저》,《혜환시집》등이 있다 
  

남인계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이언진.이단전과 같은 걸출한 여항시인들을 제자로 거느리기도 했다 

천민 시인 이단전 < 1781년 어느 봄날 못생긴 청년 하나가 재야 문단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던 73세의 대작가 이용휴를 찾아왔다. 그 청년은 소매자락에 넣고 온 시집을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천천히 시집을 훑어보고는 좋다 나쁘다 말도 없이 곁에 있던 벽도화(碧挑花) 가지 하나를 꺾어 청년에게 주었다. 청년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가 빙그레 웃으며 제자 가섭에게 꽃을 주어 그를 인정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이 떠올랐기 대문이다. '내 너를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하겠노라.'라는 마음이 벽도화 한 가지로 표현된 것이다. 이용휴로부터 상찬을 받은 청년이 바로 이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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