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세잔과 소설가 에밀 졸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의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 전학온 에밀 졸라가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자
세잔이 종종 에밀 졸라의 편을 들어 사태를 해결해 주어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에밀 졸라가 사과 한 바구니를
선물하는 것으로 그들의 우정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뒤집어져서 에밀졸라는 <목로주점> 등으로 유명 작가의
길을 걷게 되고 화가 세잔은 그리 큰 명성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만다.
한편 에밀졸라는 세잔의 정물화에 대한 열중을 폄하하는 얘기로 세잔의 기분을 상하게 하다 결국 <작품>이라는 소설에서 자살로 마감하는 비참한 화가의 생애를 그림으로써 세잔과 완전히 절연하게 된다. 세잔은 이 화가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 그것에서 더 나아가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상당히 매혹적인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글이, 자신의 목소리가 혼자만의 고독한 중얼거림에 그치고 마는 결론에 남는
그 미진한 아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 고백의 장인 일기장마저 때로는 누군가 읽을 것을 의식하며 문장을 다듬고 고백의 강도를 낮추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 재생산 되었을 때 그 글이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의 생명으로 꿈틀대고, 나름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변환 또는 변질되었을 때, 물론 긍정적인 영향으로 귀결되었을 때는 제외하더라도, 어느 사람의 가슴의 가장 연한 부분을 뚫고 상처를 남기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말로 남긴 상처와는 달리 글로 남긴 상처는 세기를 뛰어넘어 남는다, 는 얘기는 무서운 전언 같다. 

직설적으로 자기 생각을 내뱉는 글보다 어쩌면 내러티브를 통해 구성되는 소설적 장치가 더 무서운 파급력을 낳을 수도 있다.
허구라는 장치 속에 마음껏 자기 고백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그 모호성 때문에 주변의 지인들은 소설 속에서
깐죽거리는 친구 지희가 마치 자기를 얘기한 것 같고, 빌빌대며 주인공 주위를 맴도는 호식이 얘기가 자신의 삶 전반을
부정하고 비난한 것이라고 속단해 버린다.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지적은 그 명쾌함과 명료함이 규정지어 주는 그 어떤 확실성때문에 차라리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 쉽다면, 모호하고 광범위한 터치는 모두를 쓸고 갈 수 있는 붓처럼 더 위험하고 도발적이다. 

바로 너야, 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위보다
나랑 닮은 어떤 사람의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이 나에게는 더 견디기 힘든 확인사살인 것이다. 
이것은 내 삶에 대한 심판과도 같다. 과거와 오늘에 대한 설명과 해석은 감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를 견디게 해주는
미래까지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무서운 예고 속에 나의 전체를 옥죄어 버리는 행위로 증폭될 수 있다.
글쟁이가 되는 것은 특히나 소설가가 되는 것은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 어떤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 인물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행위는 상상력의 풍요로움 속에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호기일 수도 있지만, 나를, 나의 삶을 어떤 틀 안에 넣어 섣불리 규정지어 버리고 마는 낭떠러지 위로 올라가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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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12-2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그 유명한 얘기를 몰랐을까요! 잘 읽고, 또 제 무식함에 좌절하고 갑니다. ㅎㅎ

blanca 2009-12-21 13:19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에 라디오에서 들어 알았는 걸요^^ 이 우정에 얽힌 사연이 참 의미심장하더라구요.

순오기 2009-12-2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좋은 글을 써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에밀졸라와 세잔의 우정은 그게 한계였군요.

blanca 2009-12-24 16:59   좋아요 0 | URL
우정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 가장 어렵고도 힘든 부분이 상대의 성취에 진정한 박수를 보낼 수 있는가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 지점에 한계가 생기는 것 같구요. 유명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순오기님 크리스마스 행복하게 보내세요!

노이에자이트 2009-12-28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을 통해서 복수하고픈 마음을 자제해야 한다는데 역시 작가들은 그런 유혹을 벗어나기 힘든가 봅니다.서머싯 모옴<면도날>에는 헨리 제임스를 요상하게 그려서 논란이 있었죠.

blanca 2009-12-28 21:31   좋아요 0 | URL
아, 면도날 읽으셨군요. 읽고 싶다고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잊고 있었네요. 반갑습니다.^^ 작가도 인간이니까요. 사람은 결국 본질적으로는 다 비슷한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12-28 23:39   좋아요 0 | URL
모옴이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가 있었는데 <면도날>은 인기가 없지요.에밀 졸라도 우리나라에선 인기가 없는 편입니다.

blanca 2009-12-29 12:28   좋아요 0 | URL
일단 모옴 책은 재미가 있으니까요. 달과 6펜스 완전 축약 번역한 거 고등학교 때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주변 사람들한테 돌렸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명작 축약본이라니 경악스럽지만서도. 에밀 졸라는 사실 저도 목로주점이 목로주검인줄 알았을 정도니 말 다했죠^^ 그런데 노이에자이트님이 우리나라라고 하니까 괜히 외국 같이 들려요.

노이에자이트 2009-12-29 16: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우리나라에선 <달과 6펜스>가 인기있죠.그다지 두툼하지도 않고.이 소설은 폴 고갱을 모델로 했대서 화제가 되었구요.사실 그의 대표작이라는 <인간의 굴레>는 읽기엔 꽤 길죠.
목로주검...음...
실제로 독어는 거의 못하는 수준입니다.독일사,독일소설을 읽는 편이라(물론 번역판) 제가 독어를 잘한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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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않으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직 백 살 까지는 시간이 있지.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
"끝까지 못찾을 수도, 있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소설가로 살겠다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거다."

소설이 아니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남 히까리와 걷기 훈련 도중에 나눈 이 대화 속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 소설이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를 고백하는 일종의 자서전 형식
을 띨 것을 예고한다. 그리고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그의 소망은 전언처럼 실제 이 작품에서 시험된다. 산책길에서 조우하게 된 대학동창이자 영화프로듀서인 고모리의 손에 이끌려 그는 30여년 전으로 연착하며 그 담담하고 현재적인 고백을 시작한다. 

그 고백 속에는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전작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문학 작품에 대한 오마주가 녹아 있다. 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전무하다면 사실 이 소설은 굉장히 난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여배우 사쿠라의 인생 전반을 지배하게 된 소녀시절 찍은 8밀리 영화와 동명의 제목인 시 <애너벨 리>와 그녀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미군 장교의 성적 유린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는 <롤리타>를 이해하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밖에도 <미천한 사람 주드>, 작가 자신의 <싹 들고 아이 치기>,<만연 원년의 풋볼>과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 등은 실제 이 소설의 전개의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므로 해설의 '소설에 대한 소설'이라는 이 작품의 성격 규정은 적절한 것 같다. 다만 이 풍요롭고 다채로운 인용 및 매개의 역할을 수여받은 이 작품들은 역으로 이 소설 자체의 본질을 모호하고 약간 난삽한 것으로 휘저어 놓고 말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언급된 작품 전체를 최소한 통독이라도 해 보지 않은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 앞에서 그의 소설은 더없이 매혹적이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불친절한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19세기 초 독일의 작가 클라이스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영화화하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었는데, 화자가(나는 오에 겐자부로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 프로젝트(이하 M프로젝트)의 아시아판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아역배우 출신 여배우 사쿠라, 제작자 고모리와 풀어 나가는 이야기다. 이 소설이 치유라는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는 중추에는 이 여배우 사쿠라가 있다. 사쿠라는 일본의 패전직후 전후 점령군 미군 장교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되다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배우 생활을 계속 하게 된다. 일본의 소녀 시절 그 장교가 8밀리로 찍은 <애너벨 리>라는 영화는 에드거 앨런 포의 동명의 시낭송을 배경으로 사쿠라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마지막 장면이 삭제된 채로 사쿠라를 혼란스러운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녀는 그 기억을 잠재 의식 속에 숨겨 두고 망각하고 있다. 이런 그녀에게 화자인 '나'는  신성로마제국시절의 영주를 대상으로 일어난 민중봉기를 다룬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일본의 메이지 유신 전후 일어난 농민봉기로 재해석하여 보여주고, 그녀가 그 주동자의 어머니 역할을 주도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되게 된다. 사실 이 농민봉기는 '나'의 고향마을에서 전승되는 이야기로 그 주동자의 어머니와 마을 여자들이 그네들의 고난와 분노를 일종의 넋두리로 합창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실제로 이 영화제작이 중단되고 30년이 흐르고 난 지금에서 사쿠라는 이 장면만을 영화화하자는 절충안을 내놓는다. 넋두리, 이건 우리의 정서 한과도 닮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프로젝트의 아시아판을 한국이 제작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시인 김지하가 추진하기로 했었다는 대목이다. 김지하는 그 민중봉기를 동학농민전쟁으로 재해석해서 영화화하기로 했었는데 투옥됨으로써 중단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특히나 그의 어머니, 할머니, 사쿠라의 상처, 한, 그리고 그것의 배설을 통한 치유에 주목한다. 억압받는 민중의 항거 뒤에 숨어 있는 여인네들의 그 울음을 소설 밖으로 흘려 보내며 그는 그 생채기를 어루만진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엎드려 있던 그녀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녀들의 억압받은 감정의 물꼬를 튀워 줌으로써 그들의 몸에서 태어난 남성들까지도 그 삶이 가진 본질적 상처를 위무받는 대승적 차원의 치료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에 대한 문체에 대한 작가의 실험과 개방성이다. '나'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젊은 영화인 그룹에 의하여 난도질 당한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해 하지만 자신의 문체를 수정해 나가면서 도발적인 자극과 재미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 얼마나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인가. '나'는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 중요하다는 역설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형식 실험이 가능할 때 다시 쓰겠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형식이 소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주제는 누구나 하고 싶은 얘기들을 마음대로 집어들수 있지만 형식의 실험은 자신의 틀을, 문체를 깨어야 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저어하게 된다. 여기에 노년 소설로서의 이 작품의 가치가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그 과정에 대한 소설적 형식의 실험, 또 그 과정에서 화자가 청자와 함께 소통하는 형식 등이 앞서 그의 전언을 현실화해나가게 된다. 노년 자체의 그 을씨년스러움 앞에서 그래도 죽는 날까지 소설을 쓰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소통에 대한 열린 귀가 있었기에 돌올할 수 있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쉽게 책장이 넘어 가지 않는 소설이다. 수많은 텍스트의 맥락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익숙치 않은 작품들의 인용과 심지어 그 인용이 단순한 참조가 아닌 소설을 끌고 가는 구심점 역할을 할 때는 아득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문학작품들이 독자의 말랑말랑한 오감을 충족시켜 주는 그 촉수적 견인에서 진화하여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차마 말못할 그 아픈 상처들을 돌보고 위무할 수 있다는 것은 황홀한 성취의 지점이 아닐까. 넘어져서 다친 상처를 혼자 약바르고 대충 기워 놓았다고 해도 결국 그 상처는 누군가 어루만져 주어야 상흔을 남기지 않는다. 아니, 그 상흔을 다시 보며 울지 않을 수 있다. 그 누군가에 꼭 대답없는 그가 아닌, 이 책을 가져다 놓아도 괜찮지 않을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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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2-28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 신간소개란에는 이 소설을 소개하면서 미하엘 콜하스는 언급을 안 하던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군요.제가 클라이스트를 좋아해서인지 관심이 생기는 신간입니다.

blanca 2009-12-28 21:34   좋아요 0 | URL
우와~노이에자이트님 독서 내공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이 책에서 핵심 텍스트가 미하엘 콜하스 이야기라 정말 난해하더라구요. 얇은 책이지만 두 번 정도 읽어야 어설프게나마 이해가 갈 정도로. 클라이스트를 좋아하신다면 강추입니다. 특히나 미하엘 콜하스 이야기를 읽으셨거나 읽으실 계획이라면 이 책 자체를 완전히 흡수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12-28 23:36   좋아요 0 | URL
클라이스트의 다른 단편은 재미있고 줄거리도 흥미진진합니다.'칠레의 지진' '버려진 아이'가 좋았어요.그리고 클라이스트가 괴테를 존경하다가 나중에 미워하게 되는 과정이라든가 젊은 날 자살하게 되는 등 그의 생애도 파란만장하지요.

blanca 2009-12-29 12:2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사실 처음에 이 책에서 나온 미하엘 콜하스라는 얘기 자체가 오에 겐자부로가 만든 얘기인 줄 알았어요. 중반쯤 가서야 클라이스트의 실제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는데 자료가 참 미진하더라구요. 작가들의 삶은 왜 순탄치가 않은지. 그래서 사실 제가 그런 뒷얘기를 좋아라 합니다. 작품보다 자기 생으로 얘기하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추천책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2-29 16:44   좋아요 0 | URL
프란츠 카프카의 애독소설이 미하엘 콜하스였답니다.음...그러고 보니 저도 읽은지 오래되었네요.
 
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귀엽고 사랑스러운 비눗방울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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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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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p.134)  
   

주인공 요조를 통해 세상에 뱉어낸 유일한 완결된 말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자이 오사무는 서른 아홉의 나이로 생애 다섯번째 시도한 자살에서 성공한다. 그에게 자살은 하나의 처세라고 번역자는 얘기한다. 맞다. 그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유 때문에 습관처럼 자신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번번이 아주 실제적이고도 자잘한 생의 고충들을 다룰 줄 모르는 미숙함이 그를 습관처럼 자살시도미수의 진창으로 끌고 갔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어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고 익살을 부리며 미숙하게 살아가는 부잣집 도련님의 얘기.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에서의 주인공의 가정환경과 연약한 성품과 일란성 쌍생아처럼 닮아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분위기는 대척점에 놓을 수 있을만치 사뭇 다르다. '인간실격'의 분위기는 음산하고 무언가 기괴한 구석이 있다. '그후' 전체를 관통하는 몽환적이고 유미주의적 분위기가 걸어 들어갈 틈이 없다. 나쓰메의 제자였고 상류층 출신이라는 동류의식은 다자이 오사무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세계의 냉혹함과 그 기만이 횡행하는 곳에서 어기적거리며 헤매는 요조의 시선은 한없이 음울하고 기묘하다. 이 기묘함이 군데군데 정말 독자를 웃기는 아주 예리한 유머로 작용할 때는 웃으면서도 그 껄쩍지근함을 떨칠 수가 없음에 답답하다.  

세상을 향해 독설을, 그 부적응에 대한 절망을 뱉어내며 자조하는 요조는 결국 다자이 오사무다. 그는 결국 세상에의 적응을 포기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생을 종결하는 그 자유의지 만을 손에 넣어 이 작품의 속편을 스스로의 삶으로 답한다. 요조의 세 장의 사진을 통해 문을 여는 그 참신한 시도부터 결국 이 것이 요조의 기록을 제3자가 정리한 것으로 매듭짓는 그 완결감까지 아주 잘짜인 직조물에 걸린 그 수많은 허무와 음울함, 외로움, 부정들의 찌꺼기들의 미세함까지 탄복할 만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게 되지는 않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밀어넣은 그 비애와 절망이 불편한 까닭이다. 그리고 마치 모든 작품의 후속편은 그의 죽음으로 얘기되고 있을 것 같다는 기괴한 착각 때문이다. 모두가 칭송하는 행운아라는 외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만든 불행의 등에를 짋어지고 세상을 향해 뿜어내는 자신의 숨결을 그러모아 흩어 놓고 만 그의 생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는한, 그의 작품은 나를 계속 불편하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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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가수 호란이 인터뷰중 마구 칭찬해 준 덕택에 읽게 되었다. 뉴욕타임즈에서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까지 수여받은 그의 냉철하지만 다정다감한 시선이 너무 좋아 닥치는 대로 그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신경외과의사인 그는 주로 환자들의 임상사례를 통해 결함,장애, 질병이 개개인에게 어떻게 역설적으로 창조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갑자기 눈이 멀어도, 반신불수가 되어도, 기억을 잃어버려도 그들의 혹은 우리들의 삶은 비관적인 상상과는 다르게  변화 진보해 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화성의 인류학자'에서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연장선상에서 임상사례를 통한 그의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꾸려가는 삶에 대한, 명쾌한 긍정은 계속된다. 다만 후자가 약간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색맹의 섬'은 일종의 여행기다. 전색맹과 신경퇴행장애가 풍토병화되어있는 미크로네시아를 두 번 방문한 기록이다. 사적인 감상과 과학적인 성찰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양치식물, 소철에 대한 지질학적 이야기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수전 손택은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려있는 해설에 차용된 부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대중문화계의 퍼스트레이디'(이런 거 보면 미국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관념적이고 선정적인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을 즐기는 듯하다)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문화를 즐기고 감상하는 심미가에서 더 나아가 조국인 미국의 패권주의를 용기있게 고백하고 성토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진화했다. 그녀의 문장은 현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재조합되어 평범하고 무딘 사람들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어려운 내용일 것도 같은데 그녀의 펜에서는 명쾌하고 간결하게 재해석되어 나온다. 가독성이 좋다. 

일종의 사회 제반 현상에 만연되어 있는 정서에 대한 통찰로 집약되는 내용들이다. '타인의 고통'이 좀더 읽기 쉽지만 이제까지 타인의고통을 은연중 즐기고 있었다는 못된 관음증을 깨닫게 되는 불편한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연민으로 연결되지 않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그 불편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사회에서 펼쳐지는 거대 담론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그 헤게모니를 질병(결핵, 암, 에이즈)에 붙이는 각종 표식들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실제 암투병을 여러 번 하였던 그녀는 암이 생각만큼 무서운 병이 아니라 그 병에 걸린 사람에 낙인을 찍는 사회의 횡포가 더 무서운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후에 그녀의 투병기에서는 이것은 일부 수정된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그녀의 죽음 앞에서 펼쳐진 그녀를 둘러싼 풍경과 그녀의 그 처절한 투쟁을 담담하게 회한에 젖은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사실 수전 손택이 절대로 평범해지지 않을거라 절규했던 그 장면이 끊임없이 오버랩되어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추스려야 할 만큼 그녀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아야 하는 단점이 있다. 그녀는 끝까지 죽음과 불화하다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번에 이 책을 집어든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 과연 삶을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사는 것과 결국 오고 말 죽음과 화해하고 평화스럽게 가기 위해 조금 덜 집착하고 더 포기하는 것이 나은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데에 만족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나 경멸했던 타인의 고통에 대한 뻔뻔한 연민과 연루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연결은 우리도 공통의 그 피할 수 없는 종결을 공유하고 있다는 자각의 고리가 있기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따라온다. 유명인의 최후에 대한 선정적인 보고가 아니라 데면데면해서 더 담백했던 그 모자 관계 만큼 투박하지만 진지하고 특별한 책이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라고 그녀는 말했지.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한, 모든 제반 현상의 가운데에 있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책임감 있는 연민을 가졌던 그녀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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