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세잔과 소설가 에밀 졸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의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 전학온 에밀 졸라가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자
세잔이 종종 에밀 졸라의 편을 들어 사태를 해결해 주어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에밀 졸라가 사과 한 바구니를
선물하는 것으로 그들의 우정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뒤집어져서 에밀졸라는 <목로주점> 등으로 유명 작가의
길을 걷게 되고 화가 세잔은 그리 큰 명성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만다.
한편 에밀졸라는 세잔의 정물화에 대한 열중을 폄하하는 얘기로 세잔의 기분을 상하게 하다 결국 <작품>이라는 소설에서 자살로 마감하는 비참한 화가의 생애를 그림으로써 세잔과 완전히 절연하게 된다. 세잔은 이 화가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 그것에서 더 나아가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상당히 매혹적인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글이, 자신의 목소리가 혼자만의 고독한 중얼거림에 그치고 마는 결론에 남는
그 미진한 아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 고백의 장인 일기장마저 때로는 누군가 읽을 것을 의식하며 문장을 다듬고 고백의 강도를 낮추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 재생산 되었을 때 그 글이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의 생명으로 꿈틀대고, 나름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변환 또는 변질되었을 때, 물론 긍정적인 영향으로 귀결되었을 때는 제외하더라도, 어느 사람의 가슴의 가장 연한 부분을 뚫고 상처를 남기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말로 남긴 상처와는 달리 글로 남긴 상처는 세기를 뛰어넘어 남는다, 는 얘기는 무서운 전언 같다.
직설적으로 자기 생각을 내뱉는 글보다 어쩌면 내러티브를 통해 구성되는 소설적 장치가 더 무서운 파급력을 낳을 수도 있다.
허구라는 장치 속에 마음껏 자기 고백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그 모호성 때문에 주변의 지인들은 소설 속에서
깐죽거리는 친구 지희가 마치 자기를 얘기한 것 같고, 빌빌대며 주인공 주위를 맴도는 호식이 얘기가 자신의 삶 전반을
부정하고 비난한 것이라고 속단해 버린다.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지적은 그 명쾌함과 명료함이 규정지어 주는 그 어떤 확실성때문에 차라리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 쉽다면, 모호하고 광범위한 터치는 모두를 쓸고 갈 수 있는 붓처럼 더 위험하고 도발적이다.
바로 너야, 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위보다
나랑 닮은 어떤 사람의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이 나에게는 더 견디기 힘든 확인사살인 것이다.
이것은 내 삶에 대한 심판과도 같다. 과거와 오늘에 대한 설명과 해석은 감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를 견디게 해주는
미래까지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무서운 예고 속에 나의 전체를 옥죄어 버리는 행위로 증폭될 수 있다.
글쟁이가 되는 것은 특히나 소설가가 되는 것은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 어떤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 인물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행위는 상상력의 풍요로움 속에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호기일 수도 있지만, 나를, 나의 삶을 어떤 틀 안에 넣어 섣불리 규정지어 버리고 마는 낭떠러지 위로 올라가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