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I가 이제는 일상으로 파고들고 있다. 예전 같으면 주변에 물어볼 일을 AI에게 물어보고, 상담가나 친구들과 나눌 사적인 일들까지 인공지능과 나누고 있다. 무엇보다 글을 읽고 쓰는 일에 이 거대언어모델(LLM)이 끼친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다. 독자들도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상상하는 일을 인공지능에게 위임하고 심지어 글쓰기 공모전에는 뭔가 불쾌한 기시감이 드는 창작물들이 버젓이 개인의 이름을 달고 제출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문학을 여전히 읽고 쓰는 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니 그런 질문 자체가 유의미한가.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이런 질문이 떠올랐고, 다행히 과정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는 출구를 더듬을 수 있었다. 일곱 편의 수상작이 모두 작가들 고유의 리듬감으로 흥미롭게 읽혔고, 나름의 사유의 깊이로 오랜만에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최은미ㅣ김춘영


탄광 마을에서 광부들에게 술을 팔았던 여성 노인 김춘영을 면담하는 여성 연구자가 화자다. 마지막 면담만을 남겨놓고 해발 천 미터의 험준한 산을 올라간 화자가 폭설을 만나 구술자의 집에 고립되며 우연히 만나게 되는 등산객 중년 부부와 젊은 군인 사이에 빚어지는 긴장은 결국 한 인간이 타인의 고유한 경험을 간접경험함으로써 가닿게 되는 소통과 공감의 지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보인다. 이 연결은 작가 최은미의 치열하게 조탁한 문장으로 이음매가 거의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고 아름답다. 이야기의 힘과 문장의 유려함이 만날 때 얼마나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



강화길 l 거푸집의 형태


여성 가족 서사의 서늘한 긴장감과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버젓이 이루어지는 착취와 폭력의 중층적인 구조를 이야기의 형태로 보여주는 데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작가로 강화길을 빼놓을 수 없다. 친밀하다고 느꼈던 막내이모와 조카 사이에 끼어든 죽음이 가져온 파국의 내막은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김인숙 ㅣ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어느 순간 우리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보호와 위계가 역전되는 기점을 맞게 된다. 경제, 건강, 노령화 등 그 시점은 가족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그 시간은 누구나에게 오고야 만다. 자식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기능하며 이제 약해진 부모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에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 그건 비극일까, 자연스러운 섭리일까. 사랑해서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딸을 포기하지 않았던 엄마는 딸에게 증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그 어머니에게서도 그 딸에게서도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굳이 답을 주지 않고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런 공감을 자아내기는 쉽지 않은데 작가는 그 어려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김혜진 ㅣ 빈티지 엽서


주인공 여성이 헬스장에서 고춧가루를 생각하는 도입부부터 읽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특히나 "삶에서 사소한 정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생각을 그녀는 자주 했다." 같은 문장을 맞닥뜨리고서는 더더욱. 그녀가 저지른 일은 불륜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륜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 미묘한 지점들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과 우리가 사는 것들의 그 낙차에서 아찔해져 버리는 체험은 김혜진 작가 아니고서 누가 이렇게 탁월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배수아 ㅣ 눈먼 탐정


성경의 <누가복음>에서 죽은 예수가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는 배수아 작가의 인장이 군데군데 찍혀 있다. 초현실, 비현실, 이런 해석들로 이 중층적인 이야기를 감침질하는 건 실례가 될 것 같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이야기가 이토록 현실 전체를 감싸안을 수 있다는 발견은 놀랍다. 삶, 죽음, 이별 등의 거대한 추상성이 구체화의 외피를 두르지 않고 현현하는 놀라운 체험이 가능한 이야기.



최진영 ㅣ 돌아오는 밤


내 친구의 죽음 대신 직장 상사 지인의 장례식장에 참석하기 위해 무민의 나라 핀란드를 경유해 가 돌아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돌발적인 사고 앞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건 무얼까. 모든 경험, 모든 소통이 온라인화되는 이 세계에서 정작 내가 실제로 겪은 건 인간의 폭력이었다. 



황정은 ㅣ 문제없는, 하루


나는 현실적인 삶을 살고 동생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들로 괴로워한다. 나는 그 동생이 현실에 닿아 있지 않다고 걱정하지만, 정작 이 자매가 터널에서 만난 사고는 타인의 고통에 연루되지 않는 감각이 얼마나 큰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에게 '문제없는, 하루'라는 감각은 정작 '문제없는 하루'를 불가능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그 많은 폭력들은 결국 우리에게도 돌아올 테니까.



쉽고 편리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여전히 작가들은 고심하고 쓴다. 그 노력과 그 노력이 가지는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11-0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09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때로는 내게 일어난 일들이 정말 일어난 게 맞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어떨 때는 내가 읽거나 본 것들이 더 진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젯밤 내가 꾼 꿈이 내게 일어났던 일들의 흐릿한 기억보다 더 와닿을 때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의 힘은 경이롭다.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고 간접 경험할 때 우리 대뇌에 켜지는 불은 내가 실제 경험한 것과 밝기에 큰 차이가 없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집 <레티파크>에는 화자가 친구와 공유했던 정신과 상담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가 투영된 작품의 뒷배경이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에서 자세히 나온다. 실제로 유디트 헤르만이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정신과 의사와의 한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편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개인적 스토리들은 태피스트리처럼 엮여 또 다른 차원의 스토리라인을 구성한다. 에세이집을 표방했지만, 우리는 그저 작가가 이름 붙인 장르 속으로 들어간 유디트 헤르만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된다. 이쯤 되면 사실과 진실과 허구는 한데 섞여 모호해진다. 그리고 굳이 확실하게 그것의 경계를 긋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무용한 것인지 설득당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고 굳게 믿는 것들이 사실은 그저 하나의 상상, 환상, 내 삶의 이야기에 통합해서 간직하고 있다 수시로 꺼내어 확인하고 싶은 하나의 거짓일 수도 있다. 



















라디오 피디인 정혜윤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내내 따라 읽어왔다. 텍스트를 향한 그녀의 사랑과 열정, 그 특유의 해석력에 때로 감탄한다. 그녀도 나이 들고 그녀를 따라 읽은 나도 나이 들며 그녀의 글도 이제는 희망과 내일과 꿈과 내일에 대한 전망보다는 상실과 어제와 그러나 더 엷고 넓게 퍼진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합의된 공명을 일으킨다. 이 세상을 채우는 건 인간 주도의 인간만의 독점적인 관계나 사랑이 아니라 그 모든 생명들의 상호 연결에서 비롯된 신비의 오라다. 


작가가 잃은 사랑과 얻은 사랑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모비딕>을 언젠가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이야기.





김연덕 시인을 만나게 된 건 지금도 젊지만 그녀가 정말 젊디젊었을 때 한 문예지에 기고한 에세이였다. 그 정갈한 문장들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기억하고 있다 시인인 그녀가 쓴 에세이들을 모조리 찾아 읽겠다, 결심했었다. 


시인이 찾아간 일본의 소도시, 아오모리에 대한 이야기와 시들이 여전히 정결하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노인들로 가득한 도시가 어떻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무기력하고 무력하고 쇠퇴한 지방처럼 보이지 않고 여전히 거기 그대로 놓여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그립게 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 대해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김연덕 시인은 그 작업을 해낸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아주 많은 대화를 하고도 금세 다 잊어버려도 또 다시 그들과 만나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의 가치에 대하여 듣다 보면 아, 늙음이라는 게 이럴 수도 있구나. 젊음과 소통하는 지점을 이렇게 다시 낳을 수도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된다. 

시인이 순전히 사과 때문에 떠났다던 '아오모리'에 그 사과가 아니어도 방문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야기. 


이야기는 이야기라고 믿고 불러오며 시작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10-14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14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뾰 있어요?"

무료배송이 되지 않는 한 권의 책은 되도록 동네서점을 이용하기로 하고 있다. 모든 책이 항상 있는 건 아니라서 전화로 일단 물어보고 없을 경우 주문 후 하루, 이틀을 기다리는 시스템이다. 때로는 불편하고 느린 이 상황에 익숙해지려 한다. 손끝에서 바로 반응하는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려 한다. 다만, 문제라면, 내 발음이 별로 안 좋은지, 대체로 전화를 받는 직원은 재차 책 제목을 확인한다. 그 과정이 때로 민망하다. 이미 이 책을 찾기 이전부터 그랬다. 옆에 있던 다 큰 아이는 그럼 작가 이름부터 이야기해보라 시킨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바로 알아듣고 주문해 주기로 한다. 


"뾰"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말이다. 대체 뭘까? 예전 문학동네 웹진에서 백은선 시인의 에세이가 참 좋았던 기억이 나서 난다 출판사 시의적절 시리즈에서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내심 반가웠다. 시인의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다. 그녀의 삶과 그녀의 시를 분리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을 발견할 때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을 받는다. 




처음부터 좋아서 다시 되돌아가 읽기도 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더없이 치열하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을 직조하는 문장의 무게는 각기 다르다. 쉽게 쓴 글은 들킨다. 모를 수가 없다. 어렵게 고통스럽게 하나하나 공들여 쓴 글은 읽는 사람이 가장 먼저 그 자장을 감지하게 된다. 이 에세이는 긴 산문시 같다. 특히 시를 쓰는 시인의 삶의 무게라는 것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이다지도 무겁고 가혹하고 때로 환희에 찬 것이구나, 하면서.


나도 시에 도전해 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 백일장 때 매번 쓰는 산문이 지겨워서 아무말 대잔치격인 시를 썼다. 써놓고 보니 제법 내 눈에 그럴듯하게 보였다. 작문 선생님이 내 시와 나보다 어린 남학생의 시가 경쟁했고 이왕이면 어린 친구 손을 들어주는 게 맞다 싶어 그 남학생의 시를 뽑았다고 이야기해줬지만,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시는 아무나 못 쓴다. 그리고 그 '아무나'에 내가 들어간다. 나는 시인이 될 수 없고 시를 쓸 수 없다고. 바로 단념했다. 내가 그 남학생보다 나이가 많아 수상을 못한 게 아니라, 내 시가 별로였다는 얘기를 돌려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중략>

남은 평생 단 하나의 단어만 말할 수 있다면

뭘 선택할래?

언젠가 네가 물었고

난 눈을 감은 채


하고 답했지


<중략>

-백은선 <뾰>


남은 평생 단 하나의 단어만 말할 수 있다면

하고 답하는

그런 사람 앞에 잠시잠깐 서게 된다.


너무나 많은 부정과 부인에 둘러싸여 있는 세상에서 단 한 명 이런 사람이 있다면, 

삶은 견딜 만한 것이 되겠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08-15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네 서점을 이용하고 싶어도 이제는 동네에 서점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 참 안타까우면서도 서글프네요.

blanca 2025-08-16 11:11   좋아요 0 | URL
계속 없어지고 있어요. 내가 한 권 사준다고 서점이 흥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문을 열고 있어야 할 이유를 주고 싶어요.
 

막 문을 닫으려 할 때쯤, 살짝 술 냄새를 풍기며 알딸딸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손님이 가끔 있다. 대부분 남자인데, 시집을 사는 사람이 많다. 근처에 술집이나 바가 많아서 한잔하고 돌아가는 길, 불빛에 이끌려 무심코 들어오는 게 아닐까 싶다.

-<술김에 시를 사다> 다지리 히사코 '책과 고양이 (그리고) 나의 이야기' 




술에 조금 취한 남자 손님이 불빛에 이끌려 이 작은 서점 문을 밀고 들어와 시집을 사가는 정경을 상상해 본다. 그는 평소엔 서점을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를 쓰거나 읽는 일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 먹고 일하고 자고 사는 일은 고단한 일이다. 그 사이로 동네 작은 서점을 가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도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 사이로 동네에서 책을 팔던 많은 서점들이 문을 닫았다. 이제 어린 아이가 책 살 돈 없이 그저 책을 둘러보고 가도 괜찮다고 다정하게 말해주며 작은 의자를 내어 주는 그런 서점 주인이 자생해 나갈 길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은 전투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 타령만으로 살아나갈 길은 요원하다. 그래도 이따금은 그래도 이런 글들을 읽고 안식을 얻고 싶다. 여전히 그 틈새에서 고군분투하며 지켜나가는 그 무엇들에 대한 희망과 신뢰와 기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 


"작가님, 작가님의 단편 <뉴욕제과점>을 낭독해주셨으면 합니다."

"한번 해볼게요."

<중략>

그와 함께 만든 세계가 있다. 일본에서 불고 있는 '한국 문학은 재미있다'는 세계. 이 세계를 가장 먼저 함께 만들어준 김연수 작가가 항상 고맙고 자랑스럽다.

-결국 다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김승복>




도쿄의 진보초 거리. 고서점 150여 곳이 모여 있는 책의 거리에 유일한 한국어 책방 <책거리>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에는 놀랍게도 '책거리'를 운영하는 저자와 김연수 작가와의 사연이 나온다. 책방 주인은 책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그 책을 읽히게 하기까지 그 여정에 독자와의 소구 지점을 빚어내는 데 수많은 관계망이 있다. 작가들에 대한 제안들, 그 제안들은 제대로 그 속마음을 전달하고 취지를 공감하며 또 그 상대의 현실과도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거의 처음부터 언제나 친절하게 적극적으로 시원하게 상대의 제안에 따뜻하고 적극적으로 응해서 그의 기세를 꺾지 않고 결국 그 책방이 흥하게 하는데 일조한 작가가 김연수라니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쓴 작가가 이 한국어 책방의 세계 확장에 기여했다니 감동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모든 행위가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이 삭막한 세계에서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작은 동네 서점이 있다는 건 삶이 아무리 분주하고 소모적이어도 최후의 보루가 어디에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위안을 준다. 아무쪼록 오래오래 이 서점들이 버텨주기를, 흥하기를, 그리고 그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들이 그 위안과 안식처를 잃지 않기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7-31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술 한잔 걸치고 가는 길에 시집 1권을 사는 아저씨라니 왠지 짠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이걸 보면 아 책방은 1층에 있어야겠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작은 책방이 따뜻한 온기를 부디 오래 오래 유지할 수 있기를... 좋아하는 김연스 작가의 에피소드도 좋네요

blanca 2025-07-31 11:42   좋아요 1 | URL
우연히도 이 책 두 권을 연달아 읽게 됐어요. 언제든 문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동네서점 한 곳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따뜻한 스토리가 많더라고요.

moonnight 2025-07-3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따뜻합니다^^

blanca 2025-08-01 07:54   좋아요 0 | URL
서점 얘기는 언제나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아요. 동네 서점은 추억저장고죠. 오래오래 버텨주기를…
 
홈랜드 엘레지
아야드 악타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국, 조국, 민족은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의 슬로건이 되어 지나치게 화석화된 용어처럼 느껴지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개념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혹은 기대보다 훨씬 자신이 속한 민족, 나라, 문화, 언어에 영향을 받는다. 


잠깐 미국에 거주한 경험으로 내가 이민자의 삶을 감히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스쳐가듯 만난 이민자 친구들이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겪고 소화하고 때로 감내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다른 피부 색깔이나 식습관, 언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아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미국이라 이야기하지 않았다. 인도, 한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그들은 떠나온 나라를 "내 나라"라고 표현했다. 다시 돌아갈 일이 없어도 그랬다. 오래 전에 떠나왔어도 이민이라는 건 내가 떠나온 그곳을 녹여 융합하는 과정이 아닌 것 같았다. 



한때 트럼프의 심장 질환 주치의였던 아버지를 둔 2세대 이슬람께 이민자 극작가 아야드 악타르의 자전적 소설인 <홈랜드 엘레지>는 도발적이면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일단 픽션이라는 외피를 입은 자전적 요소의 과감한 표현이 강렬하고 생생하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들은 '그래, 이건 지어낸 소설이야.'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정도였다. 물론 그 경계가 어디인지는 작가만 알 수 있을 것이다. 


파키스탄 의사 이민자인 아버지가 만난 당시의 트럼프는 경제적으로 최악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와준 무슬림 의사에게 보인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이후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고 아들과 이 문제로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낳고 키운 아들 앞에서 때로 자신이 떠나온 나라를 폄하하고 미국을 칭송한다. 기회의 땅, 준법의 땅, 성취의 땅. 이 판도가 바뀐 것은 911 이후였다. 사람들은 단지 무슬림의 겉모습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오래전 이미 떠나온 조국, 민족, 종교를 상기시키고 배척한다. 무슬림은 존재만으로 배척, 배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경험을 수시로 하게 되고 각종 민감한 사안에서는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결정타가 된다. 911의 상흔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와 상처를 남겼고 이것은 이민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일상이 외부인들의 테러에 의해 언제든 유린당할 수 있다는 학습은 모두의 미래를 불안 속에 잠식시켰다. 


작가의 아버지는 환자가 제기한 지난한 의료 소송에 시달리다  결국 도망치듯 빚을 남기고 그렇게나 칭송하던 미국을 떠나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내 피의 모든 원자가 이 땅의 흙, 이 땅의 공기로 빚어졌다. 하지만 이 많은 것은 나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고 선포했던 아들의 마지막 문장은 결국 미국이 내 고향이라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의 설득력은 결국 작가의 필력에서 나온다.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에 이렇게 이입해서 읽은 적은 오랜만인 것 같다. <홈랜드 엘레지>는 그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낯선 이야기다. 낯선 이야기가 일깨우는 그 고유의 공감대는 인간이라면 결국 태어나 자란 한때 기억하는 내 고향에 대한 생래적 이끌림에 대한 엘레지, 고향을 떠나 순례하는 과정이 결국 삶이라는 자각, 언제나 우리의 타인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지만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는 체념이 만나는 데에서 나올 것이다. 강력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