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오 바쇼는 평생을 길위에서 보내다 객사했다. 무사의 길을 포기했고 그가 길에서 지은 수많은 하이쿠들과 산문들은 절창이 되어 남았다. 17세기의 시인은 수세기가 지나 자신의 시가 때로 잔인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줄 예감하지 못했다. 일본의 정신은 바쇼의 언어로 응축되었고 일본은 천황이라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접합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정복할 날을 꿈꾸었다. 그 부속품에는 타민족들이 있었고 그 수단은 검이었다.


이차대전 당시 1943년 초  점차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이 타이-미얀마 간 대규모 철로를 건설하려 수십만의 연합군 포로를 동원했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캠프에는 심지어 호주인, 대만인, 타이인, 자바인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 대신 일본은 그들이 죽어가며 만들어낸 증기기관차를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하여 자신들의 사악한 행동을 면죄받고 일본의 정신을 밀봉하려 했다. 이야기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익명으로 잊혀간 총 이십오만 명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다.
















"왜 태초에는 항상 빛이 있는 걸까?"로 시작하는 도리고 에번스의 회고는 기억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선형적이지 않다. 그는 때로 고모 에이미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 청년이었다 시암의 정글속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의 대령을 오가는 일흔일곱 살의 전쟁 영웅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적국 일본의 무모한 일본의 철로를 건설하는 명령에 호주의 포로는 자신이 이끄는 죽어가는 부하들 중 가장 죽음에 덜 근접한 이들을 선별해 내어 그 진창에 집어넣는 일에 협조해야 했다.


언제나 그들을 위한 일. 그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매일 그는 자신의 사랑이 실패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의 세계. 인간에 대한 존중도 존엄도 애저녁에 포기한 곳. 몸을 제대로 가릴 옷도 먹을 것도, 썩어가는 피부를 치료할 약조차 없고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백 명 앞에서 짓이겨지는 진창에서 그들은 서로 짐승처럼 사랑했다. 미워하고 투닥거리던 동료에게 자신의 형편없는 배급음식을 나누어 주고 똥통에 빠진 죽은 시체를 들어올려 장사지냈다. 아무리 그들이 짓밟으려 해도 전멸시킬 수 없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눈물겹다.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실제 그 현장의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폭력의 역사의 현장에서 광기의 신들이 날뛰는 정글에서 길어올리는 참혹한 실상과 '나'가 아닌 '우리'에 기대어 마침내 생존의 출구를 찾아내는 이야기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의 시선은 피해자에게만 닿아있지 않고 반성없이 그 그 가해자의 패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비판없이 오히려 미화하며 수행하는 일본군 가해자들의 시점에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들이 전후에 일상의 삶에 어떻게 편입되는지, 제대로 된 악행의 청산없이 스스로를 어떻게 포장하고 정당화하는지에 대한 과정에 대한 탐사도 이어진다. 


조선인 부사관 최상민에 대한 이야기. 식민지국의 백성으로 가해자의 꼭두각시에 동원되는 그의 비극에 대한 설명은 먹먹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원하지 않음에도 그는 오스트레일리안 포로를 잔인하게 때려야 했다. 정작 1급 전범들은 용서받았음에도 시스템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조선인 최상민은 영문도 모른 채 처형당해야 했다. 이 모순과 이 억울한 방랑의 이야기에 호주인 작가가 부여한 서사는 놀라울 정도의 이해와 공감이 있다. "어머니가 담근 매콤한 김치"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대목. 어떻게 이러한 감성, 이러한 그리움을 알아냈을까.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기억에서 길어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의에 상관없이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가해자적 입장에 폭력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비극적 역사에 대한 복원이 정작 우리의 손이 아닌 머나먼 나라의 작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니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페이지가 없었다. 그의 인생이라는 책이 그대로 끊어져버렸다. 그의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그는 평화도 희망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도리고 에번스는 사랑 이야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였다. 

그는 지옥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사랑 또한 지옥이므로.

사랑이라는 '지옥'에 대한 절창. 그 기적에 대한 믿음이 삶을 지탱하는 연가. 인생이라는 시. 이 모든 것이 한곳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비극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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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07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두고 여태 안읽고 있었는데, 이제 읽어야할 때가 온 것 같네요. 블랑카님 글은 역시 좋네요.

blanca 2019-05-07 12:0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도 이 책 그 문학동네 북클럽 가입하며 신청해서 받아놓고 막상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두었다 시작했어요. 초반부는 뭐랄까 좀 진부한 것 같아서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 싶어서 안 읽으려고도 했다니까요. 아, 다 읽고 나서는 정말 심장이 두근거려서... 맨부커는 딱 그 어떤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좀 서정적이면서도 진지하고 작품성도 있고 묘사력도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재주가. 마이클 온다치 생각도 나더라고요. 여하튼 한국 경비병 얘기 쓴 대목에서는 대체 이 사람 뭐지? 이랬어요. 호주의 백인 작가가 어떻게 한국 사람의 역사와 마음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혹시 부인이 한국인인가? 이런 심증까지 들었어요. 댓글이 너무 중구난방 길어졌네요. 핵심은 꼭 읽으시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예요. ^^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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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웬만하면 참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거나 취향이 아니면 초반에서 책을 멈추기로 하고 있다. 나는 더이상 하루 종일 시간이 너무 많아 주체가 안 되던 이십 대가 아니므로 남은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팟캐스트에서 알게 됐다. 무언가 진중하고 사려 깊은 느낌의 목소리. 확신에 찬 어조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후로는 오히려 이런 머뭇거림이 때로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요는 초반부의 감정의 과잉이 식상하다는 생각에 멈추려 했던 읽기가 종반부에 와서는 이야기가 끝날까 아쉬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인 포로 경비병의 시선에 대한 묘사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 다 읽기 두려운 이야기. 알기 전과 그 이후의 진실의 무게는 하늘과 땅차이다. 실제 일본인의 포로였던 아버지의 체험이 투영된 호주 작가의 이야기. 아버지의 임종과 이 이야기의 완성은 맞물렸었다 한다. 시작이 이야기의 전부를 이야기해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 읽고 다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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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B. 피터슨은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삶은 원래가 고해'라는 이야기, 소아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키운 딸 이야기가 와닿았다. 뭐랄까, 진부하거나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언변이 설득력이 있었다.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사변적이지 않고 그것에 따른 해석이나 평가가 고답적이지 않았다. 그의 종교적인 색채나 논쟁적인 발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그의 논쟁적인 입지를 닮았다.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은 기억할 만한 대목이 많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섣부른 이상주의, 기만, 위선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이기심과 권력욕, 악에 대한 시선의 깊이와 명료함도 놀랍다. 한 마디로 낭만을 박살내는 엄중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근래들어 삶에서 중구난방으로 일어났던 각종 유쾌하지 못한 일들이 전혀 개별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삶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음에 대한 깨달음이 왔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삶의 엄중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낭만이 끝났음을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낭만이 끝났음'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 인정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혼돈과 무질서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고 그것을 뚫고 나아갈 기량이 부족했다. 다소 직설적인 표현이 많아 때로 움찔할 정도다. 하지만 누군가는 옆에서 반드시 이런 조언들을 삶의 길목마다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일의 무게, 엄중한 책임은 흔히 쾌락과 편의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쉽고 즉각적인 쾌락, 보이는 것들의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알곡과 실재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하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는 조언은 나를 저격했다. 


당장 편하자고 갈등 상황을 피하고 문제를 언어화하는 데에 물러서는 자세에 대한 비판도 기억해 둘 만하다. 욕망의 경주장에서 정작 놓치는 것들에 대한 지적과 의식적인 노력과 주의에 대한 각성은 날카롭다. 



아쉬운 점도 있다. 기독교 교리가 절대 해법으로 제시되는 대목과 페미니즘과 성차에 대한 의견은 편향적이라 불편한 부분이다. 많은 이야기를 깊이 있게 하려고 시도하다 제대로 된 완결을 짓지 못하고 성급히 마무리해 버릴 때도 있다. 결함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책인데 장점도 그 만큼 많은 책이라 읽어보면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리는 비판적인 태도가 필요할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유튜브에 저자의 강연이 많으니 같이 찾아 함께 들어보며 읽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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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은 건조하고 멀다. 머리와 가슴은 떨어져 있다. 나만 해도 그렇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앞에서 사근사근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일본인의 간극을 쉽게 메우지 못한다. 일본 문구를 쓴다. 일본인 작가가 쓴 책을 읽고 감동 받는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 사라져 가는 증언자들의 뉴스, 일본 정부의 망언들. 가슴으로 분노하거나 수시로 흥분하지는 않는다. 그랬다.
















<White chrysanthemum>, '하얀 국화' 영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메리 린 브레트의 첫소설로 제주도의 해녀였던 소녀가 강제로 일본군에 위안부로 끌려가며 헤어지게 되는 자매의 이야기다. 언니 하나는 아직 어린 소녀인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 장교를 유인하게 되고 결국 만주까지 끌려가 정신대에서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몸과 마음을 유린당한다. 추상적이고 멀었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은 작가의 펜끝에서 구체적이고 실감어린 증언으로 형상화된다. 


Ten hours a day, six days a week, she services soldiers. She is raped by twenty men a day.

-<white chrysanthemum>


전쟁이라는 폭력과 강압을 용인하는 공간에서는 가장 보호받고 배려받아야 할 약자를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가장 치사하고 비열하게 조준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폭력과 공격성을 발휘하기 위하여 그들을 짓밟고 유린하는 작태는 더없이 역겹다. 현재 진행형으로 언니 하나가 겪는 하루하루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이건 허구가 아니다. 어쩌면 더한 차마 언어로 살아남지 못한 많은 일들이 그대로 묻혀버렸을 것이다. 살아남은 동생의 시선은 우리 모두의 것을 대변한다. 엄혹한 어두운 시대를 통과한 많은 이들이 죽어간 잊혀간 상처받은 많은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기억해야 한다. 생존은 어쩌면 비겁하고 이기적인 것과 결별하기 어려운 지대에 걸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존엄을 내어주지 않는다. 속수무책으로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피해자적 측면에서도 끝내 결코 저들이 가져갈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묘사에 작가는 공을 들인다. 가족에 대한 사랑, 결국 살아남고야 마는 자존의 힘은 형형하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른다. 언니의 과거와 언니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할머니가 된 동생의 이야기의 끊임없는 순환은 유기적이고 드라마틱하다. 동생은 언니가 어쩌면 꺾여버렸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하나가 집에 결국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삶을 찾는 마지막을 선사한 작가의 바람이 투영된 결말이 아름답다. 도망치기 위하여 돌아가기 위하여 분투하였던 삶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대목은 식민사관에 의해 오도되고 간과되는  우리 민족의 결기를 부각시키는 것 같아 시원하다. 


흐릿했던 사실의 나열을 잘 꿰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은 그래서 여전히 유의미하다. 이야기의 힘은 이런 것일까? 너무 많은 수치심을 조장하는 상황에서 용기있게 하마터면 묻히고 말았을 진실을 용기 있게 증언한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그 뒤에서 현재의 가족, 상황 때문에 차마 나설 수 없었던 다수의 그분들의 망설임도 헤아려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 비겁하고 악독한 행태에는 분명 어두운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진실은 결고 언제까지나 자의적으로 가공하거나 덮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남은 자들은 그 청산하지 않은 부채를 떠안고 무겁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행했던 역사적 만행의 용인은 반드시 화살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가족을 위해 일하고 사랑하며 일상을 살아나가다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뒤안길에서 죄없이  무명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하얀 국화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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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만 우리들의 역사를 가졌을 뿐이고, 그 역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그렇다. 우리는 잊힐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아무것도 할수 있는 일은 없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심각해 보이며, 버거운 결과로 보이는 것들, 바로 그것들이 잊히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우리는 언젠가 엄청나고 중요하게 여겨질 일이나 혹은 보잘것없고 우습게 여겨질 일을 알지 못한다. (중략) 지금 우리가우리의 몫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늘의 이 삶도 언젠가는 낯설고, 불편하고, 무지하며, 충분히 순수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온당치 못한 것으로까지 여겨질지도.
- 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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