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의 사랑과 삼십 대, 사십 대의 사랑은 다르다. 이십 대는 상대를 흔히 자신이 만든 그림이나, 틀 안에서 상상하기가 쉽다. 저도 모르게 자꾸 상대의 행동과 감정을 예측하게 되고 그게 빗나갈 때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만들어 낸 사랑과 상대는 이런 건데 그것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면 상대와 그러한 상대를 선택한 나를 동시에 비판했던 것 같다. 그러니 혼자 멜로드라마를 많이도 찍었다.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 행동에 온갖 해석과 가능한 상상력을 동원해 과대 망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또 이러한 열정은 성장통과 맞물린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첫사랑을 지극히 이성적이고 무미건조하고 담담하게 한다면 그게 과연 첫사랑다울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나의 사촌 레이첼>은 그녀의 여느 다른 작품들처럼 미스터리와 스릴러적 긴장을 갖춘 작품이다. 아직 이십 대 중반도 채 되지 않은 상속자 '나'에게 어느 날 나타난 이미 고인이 된 사촌형의 피앙세 레이첼, 처음에는 그녀를 고아인 자신을 키우다시피 한 사촌형의 애정을 놓고 경쟁하는 연적으로, 다음에는 점차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으로 사랑하게 되는 '나'의 심리 묘사는 탁월하다. 우리 모두가 통과해 온 그 어리숙하고 무모한 시간들. 내가 상상한 대로 내가 이끌리는 대로 상대를 멋대로 그려가며 애닯아하는 그 기억하면 아찔한 시간들을 대프니 듀 모리에 특유의 섬세하고 아릿한 언어들로 그려낸다. 그러니 독자들이 그 이십 대의 청년 필립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란 너무 쉬운 노릇이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레이첼의 모습은 매력적이지만 의아하고 상냥하지만 미심쩍다. 어떤 커다란 음모가, 은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역설적으로 레이첼을 더욱 레이첼답게 보이게 한다.
달리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나로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p.425
레이첼이 필립의 사랑을 받아주었을 때의 이 말이 너무 절절하게 들어와 박혔다. 그리고 그 반전 앞에서의 필립의 행동은 너무나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진실이라고 여기는 조각들은 현실의 일부일 뿐이다. 필립이 상상했던 기대했던 그리고 예측했던 레이첼의 모습 또한 레이첼의 전부도 레이첼의 실재도 아니다. 필립이 사촌형의 미망인으로 대저택과 영지와 각종 유산들을 탐내었다고 여긴 그녀의 비도덕성도 필립 안에서 탄생한 것이지 레이첼 그 자체는 아니다.
작가가 교수형이 집행된 장소에 선 사촌형과 나의 모습으로 첫장면을 연출한 것은 마지막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사촌형의 가르침은 "우린 누구나 결국엔 저 꼴이 된단다."였다. 사랑 이야기를 죽음에서 시작한 작가의 기민한 연출이 빛나는 대목이다. 오해와 억측과 열정이 빚어낸 참사라는 것도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나의 사촌 레이첼>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말을 가질 열린 구조다. 레이첼은 악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의 사랑은 실패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우리의 사랑을 다시 복기할 때 우리가 내릴 판단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진실이란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사건에서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다시 돌아가도 사랑은 다시 다르게 쓰이고 새롭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