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깊은 집 문지클래식 2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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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소설 읽기는 완벽한 안전 거리 너머 그 세계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였다면, 성인 이후의 읽기는 그 세계에 잡념 없이 몰입하는 건 쉽지 않지만 오히려 인물들에 너무 이입이 되어 거리두기가 쉽지 않다. 지나치게 고통스럽거나 힘든 삶을 사는 주인공들의 삶이 소설적이라기보다 이제 인생사 자체가 누구에게나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깨달음의 연속이다 보니 주인공이 아프면 그 진통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아 힘들다.


<마당 깊은 집>을 읽는 내내 1954년 열네 살의 소년 길남이의 간난스런 하루하루가 너무 생생해서 담담해지기 힘들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장자라는 이유로 일찍이 돈벌이로 신문배달일에 나서서 주린 배를 부여잡고 거리를 헤매어 다니는 모습이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 그 시대를 통과한 많은 소년소녀들의 삶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실제 대구시 장관동의 '마당 깊은 집'에 사글세를 살았던 작가 김원일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이야기다. 이념의 골을 둘러싼 엄혹한 시대의 잔재들과 휴전 이후가족과 생이별하고 정든 옛집을 떠나야 했던 많은 이웃들의 삶이 오롯이 '마당 깊은 집'을 채우고 있다. 하루하루 생존 자체가 투쟁이어야 했던 그 처절한 풍경은 소년이 그 나이에 맞는 성장의 단계를 겪는 대신 어른들의 절망, 학습된 무력감을 이미 습득해버리고 마는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삯바느질로 네남매를 홀로 건사해야 했던 길남의 어머니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자못 냉담하고 때로 잔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소년이 어머니에 대하여 양가감정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실제 작가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도 많이 투영되어 있다고 한다.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아는 어머니는 소년이 강인해지고 자립심을 키우기를 독려한다. 장난을 치거나 응석을 부리거나 포기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소년의 성장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대한 압력으로 뒤틀린다. 잃어버린 부성의 자리는 뒤틀리고 짓이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소년은 결국 어머니가 그렇게도 소원했던 어엿한 독립적인 하나의 어른이 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아기자기한 사람 사는 재미는 사방에 마치 그 이웃들이 생동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낼 정도다. 남의 집 일에 주제넘게 나서기 좋아하는 경기댁,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주인집 아들, 넉살 좋게 집안 일 거들며 인심을 얻는 일꾼, 어린 나이에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을 먹여살려야 함에도 긍정적인 기운을 잃지 않는 친구 한주. 모두 허룩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왠지 정이 가는 사람들이다. 삼십 년 뒤에 그 시절을 회고하는 화자는 이들이 자신에게 주었던 사라지지 않을 흔적들을 찬란하게 복기한다. 어머니가 툭하면 '더러운 세월'이라 폄하했던 시간들이 더럽게만 추억되지 않는 이유다. 다 같이 배고팠지만 그래서 때로 서로에게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주고받았던 세월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었던 시간들. 은결든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결국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의 시대와 연결된다는 것에 묘한 먹먹함이 밀려온다. 하루에 한 끼도 먹기 힘들었던 시간들, 주인집의 화려한 파티를 엿보며 패배감으로 울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소년은 성장하고 어머니는 늙고 화로처럼 껴안고 자곤 했던 어리숙한 동생은 약 한번 못 먹어보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다섯 딸과 막내 아들을 낳고 삼 년이 채 되지 않아 홀로 가족을 건사해야 했던 대구의 할머니가 생각나서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던 이야기의 뒤끝이 유난히 아픈 이야기. 얼마나 막막하고 두렵고 힘들었을까 차마 물어볼 수도 물어보지도 못했던 그래서 포원이 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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