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하릴없이 인터넷을 쏘다니다, 사실은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평론에 인용된 체호프의 단편집을 어느 출판사 것으로 구입하냐 열심히 고민하다, 생각보다 재미없다는 평을 읽다가 정말 재미있는 얘기와 마주쳤다. 

바로 유명한 책들에 등장한 또다른 책들과, 잘나가는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동원해 추천한 책은 대체로 재미없다는. 

솔직히 여기에 아주 극렬하게 동의한다. 또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이 재미있는게 하루키의 책에 나온 '위대한 개츠비'가 참으로 지겨웠다는 데에 동의하는 글들. 나는 '위대한 개츠비'에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책을 읽지 않을 것같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교 시절 내부 인트라넷 게시판 죽순이였던, 그러나 글을 올리지는 못하고 소심하게 리플만 달아대던 내가 영문학과 학생들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하여 올린 글을 읽고 리플에 '생각보다 지루하다던데요'라고 올린 글에 내 기준으로는 악플이 턱하니 붙어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쳇, '위대한 개츠비'가 지루하면 세상 지루하지 않은 책이 없겠네." 이런 내용이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늬앙스로 나의 리플을 비난하는 글이었는데 솔직히 그 어느 리플보다 기분 나빠짐을 느껴, 다시는 그 게시판에 리플도 달지 않았다는 소심한 기억이다. 

아무리 훌륭한 책도 그것이 소설인 바에야 재미 없어 책장 넘기는게 고역이라면, 그 책은 나에게 별로인 것이다. 그게 나의 지적 소양이 부족해 흩어진 지적 단편들을 체계적을 모아 체화하는 기술이 부족해서라거나, 인내심이 부족해 진정한 문학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재미없는 책은 싫다. 그런 면에서 나는 페터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 너무 힘들게 읽은 책이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고, '마농레스꼬' 같은 책은 겉표지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지금도 내가 왜 그 어린 시절 지루함의 결정체인 '마농레스꼬'를 그리도 고통스럽게 읽느라 방바닥을 굴러다녔을까 후회할 따름.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철저히 개인적 취향이라는게 또 재미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세상에 이런 훌륭한 작품이 책장 넘어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재미있다는 데에 전율해서 주위에 강추하고 다녔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으니, 나에게 재미있는 책과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책은 영원히 몇 개를 제외하고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소위 잘나가는 엣지 있는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는 데에서 오는 지적 교만에만 기대어 재미없는 책 추천하는 자들 나는 그들을 멀리하련다. 왜냐, 나는 단순하고 흥미를 추구하는 말초신경이 발달한 인간형이라 짧은 인생 재미있는 책들만 읽기에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까.

요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들. 읽지도 않고 검색만 줄창 해대다 언젠가 읽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나 재미없다는 평에 거북 목처럼 갑자기 목을 쑥 넣어버리고 마는. 체호프와 폴오스터와 레이먼드 카버. 잘난척하려고 읽어야 하는지 심히 고민중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드 2009-09-2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정말 재미있구요. 재미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실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 민음사 정도가 무난하지 싶어요.

폴 오스터는 번역이 어려워요. 신경 집중해서 읽어야 하죠. 영어만 된다면, 원서는 정말 쉬이 읽히거든요. 재밌어요.

레이먼드 카버는 개인적으로 별로에요. 원서를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각각의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인 행위이죠. 어릴적 읽었던 책과 지금 읽는 책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blanca 2009-09-20 21:36   좋아요 0 | URL
아이구^^ 하이드님 댓글이라니 넘 영광입니다.^^ 체호프 이미 질렀답니다.잘한 거 맞죠? 아,레이먼드 카버는 별로군요. 근데 폴 오스터는 꼭 읽어보려고 생각중이었답니다. '달의 궁전'부터냐, '빵굽는 타자기'부터냐가 좀 고민인데.번역 문제가 외서 읽을 때 제일 걸리는 문제인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경우 훌륭한 번역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던 터라 더. 그래도 참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하고 상대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같은 경우 괜히 좋기는 하더라구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 기대 이상이었다고 과장하고 싶지는 않고 총평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는 전제 아래, 기대의 지평선 아래 약간 가라앉아 있는 느낌으로 출발했다 역시 그가 밀어올리는  바람에 지평선 위로 와버렸다는 얘기.

그 느낌은 흡입력이 다소 떨어지고 작가 혼자 외쳐대는 것 같은 작품이 한 두개 있었고, 저자를 숨겨두고 보더라도 반드시 김연수의 것이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우주 공간 얘기를 조금 남발한 느낌이 들고(내가 요즘 코스모스를 어렵게 읽고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것일수도) 사회적 맥락 속으로 개인의 삶을 가져다 대려고 한 무리수가 조금 노출되었다는 점 등을 주제넘게 지적하고 싶다. 요새 문학 작품들을 놓고 사회와 유리되어 개인의 삶 속에 침잠하여 문제의식이라고는 없다고 비판들 하지만 이 명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문학 작품 본연의 낭만성이 부옇게 흐려지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이 되거나 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단점부터 들이밀고 시작하는 후기이지만 김연수라는 작가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작가이고, 도식과 틀 속에 침잠하는 고루한 소설가가 아니라 내일로 열려 있는 문을 가장 먼저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이 시대의 이야기꾼임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아주 훌륭한 작가이다. 암.^^ 

다 거론하면서 내 취향을 주장하기는 지겹고, 좋았던 단편 두 개와 어느 리뷰어의 말씀처럼 빛났던 평론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가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참 좋았다. 무엇보다 아내의 친구로 피아노를 조율하러 불쑥 찾아온 인도인 친구의 형상화의 리얼리티가 빛났고,그와의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 속에 아내의 소망을 세련되게 깔아낸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이는 해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김연수가 직접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의 오마주라고 하는데 간단하게 언급된 그것의 줄거리가 더 매혹적이었다. 맥락의 독서가 시작되는 지점. 나는 아마도 카버의 '대성당'을 읽게 되리라. 대학시절 자원봉사를 하다 간단한 영어로 되지도 않는 소통 속에 실패한 감정의 교류만을 남긴 인도인 친구가 떠올라 더 재미있게 읽었다. 언어가 넘을 수 없는 저 영역의 소통의 영역이 또 있겠지만, 나의 생각들과 감정을 집약할 언어가 마구 엉켜 눈 앞에 둔 상대와 엉뚱한 얘기 끝에 돌연 아름다운 지점에 안착할 때의 기분은 또 색다른 것이었다. 작가도 '고독'이라는 단어에서 이 지점을 발견하고 보여준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는 김연수만이 김연수밖에 할 수 없는 얘기들이 마치 여러 색깔의 물감이 물에 풀어져 아름답게 섞이는 듯한 환영을 그려낸다. 자칫 돌연 이별을 선고받은 소설가의 평범한 연애담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자의 아버지의 직업과 그 아버지의 시력을 잃어가는 여정을 통하여 또 그것과 얽힌 권투선수의 링 위에서의 죽음과 얽혀 하나의 장대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특히나 맹인 도서관장과 함께 여자친구가 녹음한 그 아버지의 흔적을 들으며 그 소리가 끊긴 지점. 거대한 만월을 보고 마는 마무리는 소설이 어떻게 사람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자 같아 가슴이 마구 떨려왔다.  그리고 글이 그림으로 변해 갑자기 시야를 덮는 그 기막힌 경험 해보지 않은 분은 꼭 이 소설을 읽도록.

또한 해설에서는 수많은 추천도서목록을 발견하는 멋진 우연에 가닿게 된다.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평론가의 평론은 차갑지 않아 좋다. 소위 무조건 까대는 평론은 이미 그 작가에 호감이 있어 책을 펴든 독자들을 진심으로 거북살스럽게 하는 것이다. 평론가가 철저히 중립적 위치에서 작품을 차갑게 쪼아대는 것도 물론 평론의 미덕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작가를 너무 사랑해서 그가 낳은 작품마저 예뻐해 주는 모습은 괜히 인간적으로 보여 또 한 명의 독자 친구와 소통하는 듯한 유쾌한 착각을 주기에 또 그 의미가 깊다. 특히나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평론가의 얘기는 김연수를 그대로 집약해 놓은 듯해 가지고 싶은 문장이다. 그가 택한 김연수의 문장은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는 문장. 사실 내가 제일 지루하게 읽어야 했던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에서 나온 이 문장은 작품은 밀어내고 표현만 쏘옥 빼오고 싶은 욕심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이런 문장을 낳을 수 있는 김연수의 그 저력은 대체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보다 백만배는 더 깊숙한 가슴께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들보다 백만배는 더 무거워 의자에 지긋이 내려누르며 공부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오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이 해설에서 나는 정말 빛나는 문장들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를테면, 

오래된 문구가 있죠. 이런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소설은 공간과 시간 둘다의 이상적인 매개체입니다. 소설은 시간을 보여줍니다. 곧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죠. 또 우리에게 공간을 보여줍니다. 곧 어떤 일이 한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수전 손택,'문학은 자유다') 

이렇게나 소설을 잘 정의하는 또다른 표현이 있을까? 삶이 이야기가 되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고자 하는 보편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슬픈 시도와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슬픈 시도를 끊임없이 떨어지는 바위를 힘겹게 밀어올리듯 해내고 있는 김연수에게 결국은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고다. 정말. 소설이라는 장르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으로 시작해보기를 권한다. 허구의 그 허술한 바람 구멍에 인생의 암팡진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을 수 있는 현대작가. 언제나 머리가 혹은 발이 차가워 역시 소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책을 덮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작가. 그를 위화라고 부르고 싶다. 

한 때 소설을 의도적으로 멀리했었다. 그 어떻게든지 비어져 나오는 보기싫은 뱃살처럼 나에게는 결국 소설은 소설이라는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그 허술함이 거북했다. 베스트셀러작가이든, 심지어 유수의 고전 작가이든, 작위적인 반전, 입체적이지 못한 인간 군상들이 나는 지금 사실이 아닌 허구를 읽고 있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진저리가 났었다. 

여러 사람이 권하고 무엇보다 피를 팔아 삶을 꾸려 간다는 남자의 얘기, 학창시절 펄벅의 '대지'를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결국 허삼관을 만나게 했다. 이 책 일단 너무 재미있다. 근래들어 시계를 보며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질 정도로 소설을 잡았던 기억은 없었는데 조금만 읽다 잔다는 것이 결국 자정을 넘어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또한 그 결말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수미상관처럼 억지로 처음과 맞물리게 하는 결말도 지겨웠고, 쓰다 지친 작가들의 필력이 마구 드러나는 듯한 느낌도 싫었었는데 그 둘다 여기에서는 저리 가란다. 그냥 눈물이 또르르, 웃음이 또르르 굴러나온다. 그 만큼 결말이 참으로 자연스럽고도 훌륭하다. 

허삼관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리얼리티를 획득한 지점은 바로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전적으로 나쁘지도 전적으로 선하지도 않은 딱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있는 주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사실 허삼관의 장자 일락이가 그의 아내 허옥란이 결혼전 마음주고 몸 준 하소용의 아들이라고 마을사람들과 허삼관 본인, 또 허옥란까지 다 인정해 버린 다음에 허삼관이 일락이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비열하기도 하고 모질다. 나는 말미정도 가서 일락이가 허삼관 친아들이라는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는데 세련되게도 작가는 그런 단순한 반전을 사양한다. 여하튼 허삼관이 지독한 가뭄 기간에 옥수수죽에 질려 피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국수를 사먹기 위해 일락이만 남겨두고 나머지 두 아들과 허옥란을 데리고 가는 대목은 희극적이면서도 슬프다. 남은 일락이는 고구마를 사먹으며 울먹이며 거리를 헤멘다. 그러나 이 부자의 관계는 이런 일락이를 찾아 헤메다 결국 발견하고 국수를 파는 승리반점 앞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룬다. 국수를 사먹이기 위해 승리반점 앞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가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상하이의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처지가 되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며칠상간으로 계속 피를 팔며 상하이로 가는 모습은 피로 맺어지지 않았다고 단정지은 그 관계가 피보다 더 처절하고 진한 관계로 승화됨을 보여준다. 

허옥란에 대한 그의 태도는 또 어떠한가. 겉으로는 허옥란은 혼전 관계를 가지고 자식까지 낳아 뻐꾸기 둥지에 몰래 알을 숨겨 높는 철면피에 부정한 여자라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를 자라대가리로 전락시킨 장본인임에 틀림없다는 점에 그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이런 그의 비자발적인 동의 속에 숨어있는 그녀에 대한 진한 애정과 신뢰는 문화대혁명당시 대자보에 '화냥년'으로 비난받아 사람들에게 삭발까지 당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아내에게 꼬박꼬박 밥 속에 반찬을 숨겨 가져다 주는 모습에서 비어져 나온다. 또한 가족끼리 그녀를 비판하는 형식(여기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이 희화화되어 있다.)에서 자신이 유부녀 임분방과 관계를 가진 것을 고백함으로써 아내의 부정을 덮어주려는  오버스러운 용기까지 발휘한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이상적으로 소설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지난한 삶 속에서 지루하고도 생생하게 아내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더 추상적으로 박제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문학적 이상화의 틀을 위화는 박력있게 부숴 버리고 그 안에 새로운 사랑을 쓴다.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지지고 볶고 예쁘지 않은 사랑, 그러나 숨쉬는 사랑, 쉬이 스러지지 않는 사랑. 

그의 매혈은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희극적인 요소가 섞여 희비극의 절묘한 직조물을 보는 것 같다. 마치 인생처럼. 그가 피를 파는 명분은 여러가지이다. 아들 친구의 병원비를 물어주기 위해, 맛있는 것을 가족에게 먹여야 겠기에, 아들들의 상관을 잘 대접하게 위하여, 아들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공통의 목적은 바로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이다. 핏줄인  아들들에게 그 피를 팔아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하기 위하여 몸이 다 망가져 가더라도 오직 피를 팔기 위해 헤메는 허삼관의 모습은 부성의 상징이다. 멋있지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한 사회의 뒤켠에서 이리저리 치여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하게 늙어가는 아버지들. 그 아버지들은 대단히 도덕적으로 훌륭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자식에 대한 희생을 목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도 않고 그저 누구는 피를 팔고 누구는 때로 상관에게 영혼을 팔고 자존심을 포기하며 오늘도 발 디딜 곳 없이 이리저리 흐느적대며 헤메고 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질곡 있는 서사는 실종되고 단지 방대한 독서량을 전시하고 언어유희에 도착하여 독자를 어렵게 하는 작품을 내놓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한다면,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에게 내공이 부족하다고 폄하한다면, 그들에게 허삼관이 허옥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로 대응해도 되지 않을까? 그 말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는 ㅋㅋㅋ 너무 과해서 숨겨두어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장바구니담기


불행의 심리적인 원인은 다양하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다. 전형적인 형태의 불행한 인간은 어린 시절에 정상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는 어느 한 가지 만족을 다른 만족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활동과는 상반되는 것이라고 과소평가하면서, 인생을 외골수로 몰아가게 된다.-24쪽

나 자신도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어떤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행동의 절박한 필요에 의해서 그 기분에 벗어난다. 만일 당신의 아이가 아프다면 당신은 불행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32쪽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그러나 매우 집중적으로 그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두려움에 대하여 친숙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이러한 친밀감이 생기면 마침내 두려움의 칼날은 무뎌지고,모든 문제가 따분한 것이 되고,두려움에서 벗어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어떤 문제든지 자신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섬뜩한 마력이 힘을 잃게 될 때까지 보통 때보다 훨씬 강도 높게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86쪽

사실 질투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일종의 나쁜 버릇이다. 질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려는 데서 생긴다.-97쪽

어떤 사람이 직접 겪은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에 비해서 그의 마음 속에 훨씬 깊게 각인된다.이로 인해서 이 사람은 잘못된 균형감각을 가지게 되고,일반적인 사실보다 예외적인 사실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중략) 우리가 남들에게 유익할 거라고 믿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권력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126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을 해코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당신에 대하여 골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128쪽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당신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에 비해서 훨씬 적다는 점을 깨달으라는 것이다.-133쪽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150쪽

보로의 <<로마니 라이>>를 읽어본 독자는 그 소설의 주인공을 기억할 것이다.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한동안 인생의 허무를 느꼈다. 하지만 찻잔과 차 상자에 쓰인 한자에 흥미를 가지게 된 그는 한문을 배울 목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운 다음,프랑스어로 된 한자 문법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자를 해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인생의 새로운 흥밋거리를 갖게 되었지만, 한자에 대한 지식을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178쪽

결국 이 여성은 엄청난 양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치이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모든 매력을 잃고 지성의 4분의 3을 잃게 된다. 그렇게 살면서도 매력과 지성을 잃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퍽이나 운이 좋은 여자다. (중략) 자녀들과의 관계를 보면, 이 여성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이 치러야 했던 여러가지 희생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지나친 보상을 요구하게 되기 쉽다. (중략)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204,205쪽

이 세상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곧 인생의 막을 내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최초의 세포로부터 멀고 먼 미지의 미래로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중략) 미래에 확고한 흔적을 남길 만큼 위대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특별한 재능을 갖지 못한 남녀의 경우에는 자녀를 통해서만 이러한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다. -213쪽

임신 후기와 수유기에는 어렵겠지만, 생후9개월이 넘은 아가가 어머니의 전문적인 활동을 막아서는 거대한 장벽이 되서는 안된다. 사회가 어머니에게 자녀를 위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유별난 성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어머니는 자녀에게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보상을 받고 싶어할 것이다. 헌신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어머니는 자녀들에 대하여 유달리 이기적인 경우가 많다.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인데,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다면 만족을 얻기 어렵고, 또 만족하지 못하는 부모는 욕심 많은 부모가 되기 쉽다.-221,222쪽

위대한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우주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간적인 한계가 허용하는 것만큼 올바르게 자신과 인생과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짧고 하잘것없지만, 인간 개개인의 정신에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세계를 반영하는 정신을 가진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만큼 위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에게 늘 따라다니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강렬한 기쁨을 느낄 것이며,표면적인 생활이 갖은 곡절을 겪는다고 해도 깊은 본질에 있어서는 늘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244쪽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인생의 폭을 협소하게 제한해서는 안된다. 인생의 폭이 협소할수록, 우연한 사건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의미와 목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낟.-24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진지하고 좀 지루한 독서는 접으련다. 욕봤다는-..- 

그리고 고등학교 때도 전혀 이해할 수 었없던 물리,화학,지구과학,생물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 같다. 

출산으로 인한 충격파로 두뇌 능력이 후퇴하였다는 어쭙잖은 변명을 들이대도 원체 머리가 좋지 않았다는 생각을 떠나 보낼 수는 없을 것 같고. 이제는 얇고 쉬운 책만 한동안 보련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조금 지친다. 

고등학교 때 <<마농레스꼬>>를 아주 재미없고 힘들게 고통스럽게 읽었던 기억이 갑자기 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없고 가치없다는 얘기는 감히 할 수 없을이만치 너무 훌륭한 책이지만. 솔직히 완독하기에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러셀의 <<행복의 정복>>도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빨랑 읽어 버리고 다음은 <<허삼관매혈기>>를 읽고 당분간 쉬련다. 정말이다. 눈도 아프고 일단 머리에 과부화가 걸렸고, 이런 무조건적인, 양적으로 밀어붙이는 독서가 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깊은 회의감이 밀려와서. 조금 슬프기도 하고. 이젠 쉽게 가고 싶다.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우울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