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산란하다. 아이는 다리를 다쳤고 회복중이다. 예측대로 잘 풀려가는 게 인생의 방정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급작스런 사고는 언제나 억울하다. 대충 만든 김치볶음밥을 한 수저도 뜨기 전에 그 편안한 일상은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기적"이라는 말을 유념한다. 그래도 언제나 인생이 그러했듯 다시 그 전처럼 느끼는 일상이 돌아오고 있다. 고통의 역치는 결국 그 사람의 한계이자 그 생의 임계점이다. 그 주변부를 언제나 서성인다. 정말이지 살면 살수록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게 아니라고 반드시 아픈 각성의 순간이 더 앞에서 떡 버티고 기다리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겠지. 무언가를 단언하는 사람이 차라리 부러울 지경이다.
태어나서 땅에 떨어진 것은 크게 깨달은 것이다. 죽어서 땅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잊는 것이다. 깨친 이후는 유한하고, 잊힌 이후는 무궁하다. 삶과 죽음의 중간은 곧 역참과 같으니 하나의 기운이 머물러 자고 가는 것이다. 무릇 저 벽의 등잔이 외로이 밝다가 새벽에 불똥이 떨어지면, 곧 불꽃을 거두고 등잔 기름의 기운도 다한다.
-이덕무, 한정주 저 <문장의 온도> 중
이백오십 년도 전에 이덕무가 소소하게 끄적인 글들은 그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작 나보다 십 년은 훌쩍 어린 청년은 내가 살아 온 세월의 배를 통과해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을 정결한 언어로 집약해 얘기한다. "깨친 이후는 유한하고, 잊힌 이후는 무궁하다."는 그의 잠언 같은 문장이 들어와 박힌다. 결국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역참 안에서 경험하는 일장춘몽의 내 생이 하루 하루 무탈한 것을 감사하고 무탈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도 욕심일까? 모르겠다. 불꽃을 거두고 나서 경험할 '무한'의 주체는 오늘도 무한한 고뇌에 시달린다. '위대한 백 년'의 시대에서 고뇌하는 청년 이덕무의 글이 많은 위로가 된다. 그 자신이 머물렀던 역참의 온기가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