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자기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몽테뉴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과 어떤 일에 대한 경계를 찾아내는 데 골몰했다. 무슨 일에든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 않고 빌려주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나아가 "영혼의 자유를 지키면서 분명히 옳다고 생각되는 드문 순간 말고는 그것을 빌려주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중
너무 당연한 몽테뉴의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는 마치 거기 그렇게 어떻게든 있으려는 그녀를 정조준한 것 같다. 하기사 옳고 그름에 대한 자각의 순간이 이해 관계에 대한 직관으로 당연히 대체된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나날이 참담하다.
이 책의 저자인 번역자 김남주는 프랑스 문학 번역자다. 로맹 가리, 카뮈의 책을 번역했다. 더불어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도 그녀의 손을 빌렸다. <사라지는 번역자들>은 저자가 남프랑스 아를의 번역자 회관에서 묵으며 세계 각국의 번역자들과 보낸 시간들 속에 '번역'이 가지는 근원적인 한계, 질문, 자신들이 번역했던 작품들에 대한 교감이 녹아 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이란인과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의 시를 불러내는 시간, 몽테뉴를 번역한 불가리아인과 볶음밥을 함께 먹는 순간, 인세를 적게 받아도 너무 사랑하는 시인이라 그 번역 과정 자체를 행복해했던 프랑스계 폴란드인 번역자와 심보르스카의 시를 주고받는 찰나. 이 모든 시간은 모국어가 아닌 구두의 번역 행위 속을 통과한다. 저자가 이야기한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는 멀고도 가까운 지점에서 손을 잡으며 놓치고 마는 것들을 뚫고 결국 만나는 그 작은 것들로 소통하며 교감한다. 번역은 꼭 다른 언어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타인과 이야기하는 그 모든 순간의 은유가 될 수 있을 터다. 나는 '이것'을 이야기하면 상대는 때로 '저것'으로 오해한다. 나의 생각, 마음 속을 떠도는 모든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어느 정도의 과장, 거짓, 착각의 옷을 입고 '너'를 향해 출발한다. 그것은 또한 '너'가 이미 단단히 쌓은 자신만의 철책의 경계를 힘겹게 뚫고 '너'의 언어로 이해, 해석을 거쳐 다시 되튕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人間'이 되는 것은 결국 그 둘 사이의 언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사라진다. 이것을 진실로 자각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자녀를 통해 부, 권력, 명예를 세습할 수 있다는 욕망도 다 허상이다. 생은 한번 뿐이다. 모파상의 <벨아미>에서 자신의 궁색한 처지를 비관하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무대로 탐욕을 가지고 기어오르기 시작하게 된 청년 뒤루아는 하필 화려한 야회가 끝난 뒤 동행한 노시인의 엄중한 조언을 듣게 되어 밥맛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그에게 떠오르게 된다. 그는 청년 뒤루아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의 민낯을 드러낸다. 모든 것에는 결국 '죽음'이라는 종결이 있기 마련이라는 자각과 자신의 상황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그 상황에서 물러나 자신의 삶 그 자체를 객관화시키는 현명함을 가지라는 이야기는 젊디젊은 욕망쟁이 청년을 불편하게 만든다. 늙은 남자는 자신 앞에 남아 있는 죽음 앞에서 인간들이 욕망에 좌지우지되며 미쳐 날뛰는 세상을 서글프게 바라본다.
잿빛하늘이 맑게 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