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의 버킷 리스트에 에베레스트 등반 같은 것은 없다. 저질체력에 겁쟁이이니까. 무엇보다 새로운 상황이나 위기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 못하는 편이니 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이따금 내가 아는 이 세계 안에서 이렇게 맴돌다 죽는다는 것은 어쩐지 좀 억울하게 느껴진다. 겁나는 주저되는 무언가를 확 밀어젖히면 나의 지평은 더욱 넓어질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늙어가는 것과 죽음에 겁내는 게 좀 덜해질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세계는 우물 안에서 올려다보는 그 좁은 하늘이니 내가 우물에서 나온다면 탁 트인 하늘 아래 내가 두려워하던 그 모든 것들이 좀 하찮게 느껴졌음 좋겠다.

 

 

 

 

 

 

 

 

 

 

 

 

 

 

이럴 일은 없다. 내가 마흔 아홉에 몽블랑 둘레길을 걸을 일은 없다,고 지금 생각한다. 하지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혹은 알함브라 궁전을 밤에 가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하고 싶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고 대리만족을 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일을, 내가 두려워하는 그 나이에 해치워 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남자고 아동심리치료사로 외동딸의 아버지다. 이런 류의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의 이 남자는 좀 괜찮다. 부러운 점은 외동딸이 그가 원하는 대학에 무사히 진학해서 여장을 꾸릴 수 있었고 그 여행을 응원하는 아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여행길을함께 할 직장 동료가 있었다. 나이 든 남자 둘의 우정이 부럽다. 고생스러운 길을 함께 하고 의견이 다르면 충분히 대화하며 조율하고 미래에 또 다른 여정을 함께 꿈꿀 수 있는 이러한 근사한 관계는 노력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정의 중간 중간, 마흔아홉이라는 나이에 경험한 삶과 남은 삶에 대한 조망은 쉰이 노년의 젊음이라 칭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와 부합한다. 이제 죽음은 현실로 다가온다. 노화 과정의 필연적인 징후도 그러하다. 그러나 사십대보다 그는 더 느긋해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가 도보로 경험했던 몽블랑처럼 의외로 근사하다고 한다. 그가 걸어가는 바로 그 종착점에 대한 느낌도 그러하다고. 부정보다는 수용의 느낌이 더 강하다는 이야기가 다가온다. 그런게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나이듦이 아닐까 싶다.

 

2주에 걸쳐 170킬로미터를 묵묵히 걸어 낸 두 중년 남자의 이야기가 담담하지만 감동적이었다.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도 길 위의 로맨스도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얌전한 여정인데도 다시 톺아보게 된다. 별다르지 않아서 그러한가 보다. 누구나 마흔아홉이 되고 누구나 그 즈음 유한한 삶 안에서 혼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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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6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반은 아니더라도 blanca님에게 어울리는 멋진 버킷 리스트가 있을 겁니다. ^^

blanca 2016-08-17 10:09   좋아요 0 | URL
저희 버킷리스트에는 제가 지금은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아마 cyrus님은 다 하실 수 있는 것일 거예요.
수영과 자전거. 죽기 전에 해얄 텐데 무섭네요.

cyrus 2016-08-17 12:33   좋아요 0 | URL
저도 물과 자전거를 안 좋아해요. 부끄럽지만 두발자전거를 못 탑니다.. ㅎㅎㅎ 세발자전거까지 타다가 두발자전거 타는 연습을 하지 못했어요.

2016-08-18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