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처음으로 내가 이렇게 영어 공부를 한들 얼마나 늘 것이며 이 나이에 이렇게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은 회의감에 빠졌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원서를 설사 내가 영어 단어 오백 개 , 육백 개를 찾아가며 읽은들 그것을 읽기 전과 읽기 후로 내가 과연 '영어'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지,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쓴 그 아름답고 광대한 어휘를 나는 그저 짐작하고 이해하는 수준이지 죽었다 깨나도 기억해서 구사하거나 활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절망감.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영어에 대한 열의가 팍 식어 버렸다. 스무 살에 눈을 반짝이며 다니던 영어 학원과 마흔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영어 단어장을 마치 처음 보듯 훑는 간극은 심연 같다.

 

 

 

 

 

 

 

 

 

 

 

 

 

 

 

 

그. 런. 데. 프리모 레비가 이러한 심경에 내 손을 들어주었다. 프리모 레비는 환갑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젊은이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경험을 묘사한다.

 

첫 수업부터 나는 스무살, 마흔살, 예순살에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히 서로 다른지 이미 깨닫고 있었다. 

- 프리모 레비 <고통에 반대하며>

 

정말 다. 르. 다. 효율도 열의도 무엇보다 그것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 스무살에 그 언어는 내가 정복 가능하고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마흔살 정도 되면 평생에 걸쳐도 그것이 내 본래의 언어 감각에 견줄 만한 수준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물러서게 된다. 무엇보다 그 언어를 원래의 언어처럼 살갗에 새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체감하게 된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꼭 효율이 전부는 아니다. 한계가 끝은 아니다. 프리모 레비는 좀더 자유로워지고 좀더 그 언어에 애정을 가지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예순살을 이야기한다. 잔소리하는 꼰대로서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학생으로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 시간의 소중함도 고백한다. 이것은 그 모든 한계를 인정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라 무게가 있다.

 

서른다섯에 배운 운전은 분명 스물다섯에 운전을 시작한 사람과 달랐다. 지금도 나는 운전대 앞에서 겁쟁이가 된다. 경사진 곳에 평행 주차는 언감생심이다. 결정적인 시기는 분명 있다. 더 쉽게 더 빨리가 가능한 시기. 그러나 그 시간은 언제나 많은 것들로 붐벼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들은 후순위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후회, 회한은 훌쩍 시간이 흘러가버리고 그 부드럽고 생생하던 것들이 단단해진 후에라야 온다. 물론 또다른 여유와 참조점이 생기기는 한다. 하고 싶은 것들이 줄어드니 해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담담해지기도 한다.

 

쉰이 훌쩍 넘은 분이 자전거를 시작하고 금세 타고 나간다. 나는 아직 젊으니 빨리 지금 자전거를 시작하라 한다. 과연 될까? 벌써 조로한 것일까.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체득하고 내 몸에 새겨 나가는 일이 이제는 조금씩 두렵고 피곤해진다. 환갑의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젊은 아이들과 배우려고 강의실에 앉아 있던 프리모 레비가 지금 이런 모습을 보면 가소롭다고 느끼거나 그럴 만하다고 느끼거나 이십 년 뒤를 상상해 보라고 독려하거나 할까?

 

덥고 지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6-08-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도 겁이 좀 많은 스타일이거든요.
이대로 나이 먹고 늙으면 겁이 더 많아지겠지 할 것 같지만
막상 그 나이에 도달해 있으면 엇, 아니네. 괜찮네.
뭐 그런 것도 있더라구요.
그러면 반대급부로 용기가 생기기도 해요.
그러니까 나이들면 더 못할 거란 생각 버리고,
그 나잇대가 되면 그 나잇대 맞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요.
나이 걱정 마시고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 보고 싶은 일하며 사세요.
의지의 문제지 용기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인생 별 것 아니더라구요.ㅎ

blanca 2016-08-10 19:38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의 댓글을 읽으니 안심이 돼요. 먼저 그 길을 가본 선배님의 고견이 확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