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의 가치 판단 기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필립 로스는 이러한 사회적 금지, 금제의 틀을 흔들고 넘어서는 고독한 투쟁을 종종 그린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모두가 머무는 지점이 아니라 대부분이 떠나가고 홀로 그 변방을 기웃거리거나 경계를 넘어가야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1998년 여름, '부적절한 관계'라는 그 모호한 표현에 상상 가능한 모든 불순하고 불온한 것들을 우겨 넣었던 전대미문의 대통령 스캔들로 미전역이 달아 있었던 그 여름에 '나' 전업작가인 네이선의 이웃인 콜먼 실크의 이야기가 시작된 지점도 그러하다. 콜먼은 지역 대학의 고전학과 교수로 학장직을 맡아 정체된 대학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고 학장직에서 물러나서도 강의를 하다 무심코 강의 시간에 던진 말 한마디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추방당한 일흔한 살의 남자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작가인 화자에게 토로하며 어느덧 지나온 자신의 삶을 복기하게 된다. 콜먼은 분명 자신의 출신의 한계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남은 생이 이제 거의 헤아려지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기'를 찾는 여정을 걷게 된다. 거대한 체계와 고정 관념, 인습,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를 확인하고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는 과정은 평탄하지 않다. 그것은 추방에서 시작해서 영원한 추방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
필립 로스의 인물은 그 어떤 인물도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대학 사회에서 콜먼에게 극렬한 반감을 드러내고 콜먼이 막상 떠나오고도 그가 대학에서 청소를 하는 젊은 여자와 만나는 것에 강한 분노를 드러내는 젊은 여교수의 시점을 따라간 이야기도 그렇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상류층 출신의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는 콜먼과의 첫만남에서부터 묘한 긴장감과 부담을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이 나이든 정력적인 교수에 대한 끌림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결국 둘은 적이 되고 콜먼이 떠나고 나서도 그 대학의 젊은 여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된 후 그녀는 강한 반감과 혐오를 느끼게 되어 콜먼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품고 다니게 된다. 그녀가 그 편지를 부치지 않은 것은 후에 자신이 걷게 될 길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보신주의적인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마침내 분별 없이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게 되는 계기가 흥미롭다.
그녀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이는 젊은 교수는 로맨스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도 했다. 필립 로스는 이러한 복합적인 어쩌면 당연한데 언뜻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그 양면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그려낸다. 누군가를 설명하거나 이해하거나 느낄 때 우리는 수많은 모순과 충돌, 불합리가 섞여 있는 그 우물을 헤치고 마치 표면의 그 잔잔한 모습을 전부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녀는 뉴욕시립도서관에 책을 보러 갔고 마침내 근사한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약속이나 한듯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의 남편이 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상대로 로맨스를 상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막간의 공상은 갑자기 그녀보다 한참 어린 그 남자의 연인이 등장함으로써 깨지고 그녀는 항상 품고 다녔지만 결코 부칠 거라 여기진 않았던 그 콜먼의 사생활을 협박하는 그 비겁하고 치졸한 편지를 우체통에 던져 버린다. 그것은 그렇게 일어난 일이었다. 이 작은 사소한 로맨스에의 기대의 결렬로 그녀는 다시 작아진다. 이러한 일들. 어떤 일들은 너무나 어이없이 사소하게 일어난다. 어떤 말은 그 어떤 맥락 없이 성찰 없이 그대로 행해지고 망각된다. 필립 로스, 그는 징그럽게 이러한 면면을 놓치지 않는다.
나에게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일은...
바보처럼 <휴먼 스테인>1권을 중고로 두 권 주문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에 그녀와 콜먼이 어떤 대치극을 벌이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지는 게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