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늙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이 당연한 명제를 항상 실감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이 죽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도 별로 없다. 사실 이삼십 대만 해도 그 숱한 늙음과 죽음은 대부분 풍경일 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연한 타자다. 중년을 넘어서면 그 타자는 이제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때로 수긍한다. 비오는 날. 보조 보행기에 우비까지 쓰고 두 딸까지 옆에 두고도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노인의 모습이 아프다.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이니까.
생물학자인 저자 조너선 실버타운이 그러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종이 노화에서 절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준다. 450년을 사는 대양백합조개도 2000년을 산다는 자이언트세쿼이아도 결국은 죽는다. 그 생물들이 오래 사는 노하우를 우리가 빌려와서 우리의 생을 흡족할 만큼 늘리는 것은 아직 무리다. 설사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해도 행복으로 더 가까이 가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노화는 신체 유지의 실패에서 비롯하고 진화는 이것을 허용하고 어쩌면 더 선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의 추측은 영원한 젊음과 영생이 전존재적 측면에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암시를 품고 있는 것도 같다. 각 장마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여는 관문으로 사용하는 시인들의 시가 그 어떤 이야기의 전경보다 더욱 극적이고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것은 결국 필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누구나 죽는다. 누구나 사라진다. 아무리 과학이 진보하고 우리를 둘러싼 우리보다 오래 버티는 생물들의 노하우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결국 마침표를 피할 수는 없다는 근본적인 회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자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뭉클하다. 그것은 힘겨운 역설, 아이러니로 향하는 지난한 인간들의 투쟁사니까. 이 모든 수고는 조금씩 앞으로 힘겹게 밀고 나가지만 그래도 궁극에 도달하려먼 멀었으니까. 조너선 실버타운이 첫장부터 에밀리 디킨슨의 이 역설의 시를 인용한 것은 결국 그런 이유에서다.
밤은 아침의 캔버스
절도는 증여
죽음이 가리키는 것은 불멸
-에밀리 디킨슨
조너선 실버타운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중
불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멸을 희구한다는 것은 우리는 필멸의 존재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일'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