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와 하루키는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가 31년 생이고 하루키는 49년 생이니 열다섯 살이 넘는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이미 삶의 비의를 알아버린 노년의 성숙하고 세상사에 초연한 모습으로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에서 언제나 돌아가곤 하는 청년의 미성숙하지만 생동하는 모습이 남아 있어 어쩐지 두 작가가 함께 하는 모습은 잘 연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일본 삿포로에 갔다 우연히 근처의 대형 서점에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반가워했던 소회를 고백한 적이 있다. 더불어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두 작가가 실제로 만나 문학과 소설가로서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을 상상하면 재미있다. 당신의 삶이 겪은 풍상을 주로 이야기화한 박완서 작가와 자신의 내면의 심연으로 하강하여 상상의 이야기를 펼쳐나간 하루키는 분명 작품을 빚어내는 지점 그 자체는 어긋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작가로서 삶에 대하여 가지는 자세나 태도 가치관 등에서는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친구가 되기 위하여 꼭 닮아 있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너무 달라서 그 다른 부분에 이끌려 친해지는 경우도 있다.

 

 

 

 

 

 

 

 

 

 

 

 

 

 

 

 

 

낭만주의 시대의 쇼팽과 리스트의 교분도 그러하다. 리스트는 그 시대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수많은 여성팬들의 지지와 열광을 받았던 '차도남' 이미지였다면 쇼팽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인간 관계도 협소한 편이어서 둘은 언뜻 반대되는 성향처럼 보이지만 한 살의 나이 차이로 친구 사이였다. 게다가 프란츠 리스트는 친구에 대한 다감하고 더없이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쇼팽의 삶과 음악을 다룬 글을 남겼다. 문장 하나 하나에는 최후의 경계까지 넘어가 그 사람과 합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하고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후원자이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와 결국 불화하고 여동생의 옆에서 숨을 거두어야 했던 쇼팽이지만 이런 지기지우가 프란츠 리스트였다니 음악적 성취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짧은 삶이 헛되지 않다. 누군가 내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것은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특별한 교감은 분명 쉽게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다. 리스트는 친구보다 거의 갑절에 가까운 삶을 살아내며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친구의 음악에 대한 열정, 삶에 대한 경의를 이어받았다.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게 아닌 것 같다. 그 친구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친구의 성취나 환희의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을 넘어서야 타인과의 결국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소통의 경계가 무너지고 확장된다. 그것을 뛰어넘은 자리의 시선의 마주침은 삶과 죽음을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한 우정에의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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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6-06-09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와 하루키, 그리고 쇼팽과 리스트를 연결시키는 님의 글솜씨는 정말 멋집니다. 님이야말로 책을 냈어도 여러권 내셨어야 하는데.... 님의 서재를 방문할 때마다 많은 영감을 얻고 갑니다. 맨날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미안한 맘이 드는데요 보답으로 좋아요 누를게용

blanca 2016-06-09 15:15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은 사람 기분 좋게 하시는 재주가 있네요^^;; 댓글 하나로 덥지만 기운 나는 하루 선물해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