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나날들은 바깥으로 흐른다. 때로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따사로운 햇살, 향그러운 봄꽃, 젊은 아이들, 그림 같은 아가들. '생로병사'를 절감하는 하루 하루. 김연수가 맞았다.
모든 연령이 다 힘든데, 인생에서 골짜기처럼 꺼지는 나이대가 있죠. 그게 마흔 살에서 쉰 살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그 시기에 아이는 성인이 되고, 부모는 돌아가시죠. 그 두 가지 중요한 일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오히려 모두가 나에게 기대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죠.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중
제임스 A. 미치너가 <작가는 왜 쓰는가>에서 권한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었다. 4대에 걸친 부덴브로크 가문의 흥망성쇠가 이십 대 중반의 토마스 만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물론 군데 군데 너무 전형화된 인물형을 고수하려는 작가의 고집이 다소 미숙하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러한 한계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삶에 대한, 특히나 이십 대에는 도저히 알아차리기 힘든 그 생로병사에 대한 진중한 이해가 놀랍다. 청춘 안에 가두어진 시간은 앞으로 흐른다고 믿기 힘들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역시 위대한 작가의 시선은 그 너머로 향해 있다. 거대한 저택도 젊음도 삶에 대한 의욕, 확신, 꿈, 기대도 어느 순간 허물어지고 이지러져 소멸로 간다는 것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있다. 그래서 거상 부덴브로크 가의 화려한 집 안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자라나 저마다 삶에 주어진 책무와 굴레 안에서 분투하다 넘어지고 절망하고 죽는 과정에 대한 그 흐름은 대단히 실제적이다. 특히나 가업을 승계한 장남 토마스가 외견상으로 모든 것이 무난하게 잘 굴러가고 있는 시점에서 자신에게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천착하는 장면은 암시적이고 웅장하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누구나 두려운 것이구나, 싶은 마음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더 한층 사는 일에 대한 그 생래적 고통의 무게 같아 암담해지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 결국 모두가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시점은 모든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장남 토마스를 냉소적으로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 그의 내면에서 몰아치는 그 수많은 갈등, 회의를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안토니의 그 무모하고 단순한 면면을 희화화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소녀 시절과 청춘에 대한 묘사는 더없이 너그럽고 아름답다. 그래서 토마스 만이 안토니인 것 같기도 하고 토마스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인물들의 바깥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때로 일심동체가 되어 이야기한다. 해파리를 널어 말리면 그 안의 별이 남을 것이라고 믿었던 소녀는 끝내 첫사랑을 포기하고 정략 결혼을 묵인한다. 계속되는 결혼 실패에서도 결국 부덴브로크 가의 마지막 생존자는 그녀가 된다. 죽음이 자신에게 부과된 생에서의 모든 부담과 그 형식에서의 궁극적인 해방일 거라고 소망했던 토마스는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그 외양의 엄격함을 어처구니 없이 죽음 앞에서 빼앗기고 길거리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최후를 맞는다. 젊은 토마스 만 앞에서 삶은 무한히 크고 단단한 것이 아니라 작고 조야하고 허무했나 보다. 아름답고 찬란했던 의욕의 시대는 전반에 소멸과 절망과 허무는 후반에 배치되어 삶의 전개도를 그린다.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환갑을 훌쩍 넘겨 연주하는 피아노 영상을 본다. 젊었을 때의 화려한 타건과는 다르다. 무언가 아주 유려한 흐름이 있다. 격렬한 대목에서는 힘겨워도 보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설명하기 힘든 우아한 노장의 연주 앞에서 울었다는 댓글을 비로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건반의 터치에 실린 시간은 허무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것은 아닐 게다.
https://youtu.be/8mxJ1zMNr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