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당신 나이에 생각하듯이 우리 삶에는 장미꽃만 있는 게 아니라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천천히 계속 읽고 있는데 역시 아주 책장이 잘 나가지는 않는다. 솔직히 사람들과의 대화의 그 세밀화를 연상시키는 촘촘한 묘사나 감상이 때로 질리기도 한다. 그런데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다. 분명 지독한데 매력적이다. 특히나 프루스트는 사람 하나 하나의 그 진저리나는 위선이나 기만, 가식, 속물근성을 어쩌면 그렇게 적확하게 집어내어 언어로 하나 하나 풀어 헤치는지 그 귀족 살롱에서 그들의 대화를 다 엿듣는 기분이다. 민주사회를 가장한 내부의 교묘한 위계를 예상한 그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화자인 젊은 '나'는 그러한 귀족 세계를 강렬하게 동경하면서도 환멸을 느끼는 그 지점에 걸터 앉아 신랄하게 게르망트 가의 살롱을 씹어대는 중이다. 모순, 모호함의 경계에 걸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직시하며 언어화 하는 작업이 놀랍다. 이 책은 그래서 이렇게 길어지나 보다.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복제할 수 있는 소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거의 근접해 가며 일어나는 모든 일, 말하여지고 듣게 되는 그 모든 말들을 최대한 다 복기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삶과 닮아가니까 그것을 읽다 보면 정말 그러한 정경 속의 삶을 사는 듯하다.
화자는 이제 소년에서 성년기로 넘어간다. 유년 시절의 버팀목이자 평생에 걸친 판단의 준거가 될 할머니는 이제 그의 곁을 떠난다. 동경해 마지 않았던 귀족 사회의 화려한 세밀화는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과 어린 시절 집을 드나들었던 유대인 스완의죽음의 전조와 지근 거리에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누군가를 이기고 그럴듯해 보이는 허식에 얽매이는 모습은 사촌의 죽음과 방문객 스완의 죽음의 기운을 짐짓 못 보는 것처럼 거부하는 게르망트 공작의 허위 앞에서 절정을 달한다. 사실 이러한 죽음에의 거부와 향락, 소비에의 집착은 낯설지 않다. 소멸과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일상을 채우는 그 모든 사소한 것들에 끄달리지 않고는 때로 견딜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지금은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무엇보다도 저는 부인이 밖에서 하는 저녁 식사에 늦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하고 그는 남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사교적 의무가 친구의 죽음보다 우선한다는 걸 알았으며, ...<중략>
-p.484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산 자들은 죽어가는 자를 옆에 눕히고도 오늘 저녁 약속, 만남의 즐거움을 떠올린다. 죽음은 자신에게 닥쳐오기 전까지는 언제나 추상적이고 타자화된다. 스완은 그러한 현실을 담담히 감내하고 받아들이고 심지어 표현한다. 그는 죽음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든 적대감과 환멸을 무심히 포기해 버린 듯하다.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일은 비겁하고 어리석지만 그게 또 삶의 속성이기도 하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서야 어떻게 꿈꾸고 욕망하겠는가. 그러나 또 여기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그다 보면 추악해진다. 죽음을 기억하며 절절하게 사는 일은 영원한 화두다.
젊음이 난무하는 대학교 교정에 아이 유모차를 밀고 가야 했던 일은 묘한 경험이었다. 거의 모든 문을 밀어야 하고 경사로 대신 계단으로 연결된 지점들은 휠체어나 유모차 등을 이용해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적대적이었다. 영원히 건강하고 젊어 모든 것들을 비교적 잘 통제하고 누릴 수 있는 순간과 혜택이 전부인 것처럼 조장하는 사회에서 죽음과 노화, 약한 모습은 뒤안길로 밀려난다. 프루스트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나도 게르망트 가의 살롱의 그 환멸이 여전히 죽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