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그 아이는 팔 년 전에 알았지. 내 수업을 들었어."라고 시작하자 멈칫했다. 음, 사회적으로 탄탄한 성취를 이룬 나이 든 남자와 아직 세상에 나가기 전의 젊은 여자와의 이야기의 도식. 필립 로스가?

 

"나는 이미 예순둘이었고 그 아이, 콘수엘라 카스티요는 스물넷이었어." 아, 솔직히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벌써 지겨워져 버렸다. 대체 이 나이 차와 이러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진폭이 얼마나 넓을 수 있을까? 이런 단정 뒤에 이어지는 본능적이고 에로틱한 관계로 가는 그 경로의 세밀한 묘사가 결국 도착한 곳은 나의 편협한 예상을 배반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교수와 젊은 여제자와의 욕정에 기반한 그렇고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거치는 여러 변곡점에는 찬란한 찰나적 젊음이 가지는 그 아름다움과 덧없음, 사회적 기대치에 순응하며 자기를 죽이는 삶의 기만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 언제나 인간의 예상과 기대를 여지없이 비웃어 버리는 그 커다란 운명의 무작위성에 대해 생각과 감정과 언어가 들어가고 헤집고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포착하려 한다. 그러니 너무 힘겹다. 그냥 무시하고 잊고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마주해야 하니까. 남녀 간의 관계가 가지는 근본적인 불안정, 불균형, 가족제도의 그 허약하고 불합리한 지점, 모든 것을 파괴하고 허물어 버리는 시간, 그리고 근본적인 존재의 유한성으로 가는 그 처절하고 초라한 늙음.

 

노년을 상상할 수 있어? 물론 못하겠지. 나는 하지 않았어. 할 수 없었어. 그게 어떤 건지 전혀 몰랐어. 잘못된 이미지조차 없었어-아무런 이미지가 없었어. 사실 누구도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아. 어쩔 수 없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가운데 어떤 것과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 모든 게 나중에 어떻게 될까? 여기서는 둔감함이 관례야.

 

이미 지나온 궤적인 젊음조차 때로는 현재가 아니기에 또렷이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자리한 노년의 이미지는 흐릿하다. 아니, 또렷이 떠올리고 항상 의식하며 산다면 그 자체가 때로 고문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필립 로스가 케페시 교수의 입을 빌어 '둔감함'에 대한 요령을 가르쳐 준 것은 적절하다. 예민하고 예리하게 늙음과 노년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지성이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요령은 될 수 없다. 이것은 메멘토 모리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케페시는 누군가에게 자신과 콘수엘라와의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그 누군가의 존재는 끝까지 은폐된다. 그리고 콘수엘라와의 이야기는 팔년 전의 일이다. 그 어떤 때보다 나이차를 통해 케페시는 이 부유하고 보수적인 쿠바 출신의 '아이'에게 매혹당하지만 또한 자신이 생의 후반부에 다다르고 있음을, 이제는 상승이 아닌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한다. 보편적인 결혼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아들이 여덟 살 때 가족을 떠남으로써 그 아들과의 관계에서 거의 척을 지다시피 한 케페시는 '미덕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정직의 유토피아'에 입성한다. 케페시의 입장에서 이것은 도덕적인 잣대 하에 재단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한 존재로서 자기 크기를 갖고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성적 방종은 케페시에게 하나의 표현 경로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사회적 베일을 걷어 버리고 그 아래의 욕망의 속살을 직시한다. 케페시의 고백은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반항아를 깨워 일으킨다.

 

여기까지. 이게 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케페시가 향한 곳은 너무나 슬픈 도저히 예상할래야 제대로 상상하기 힘든 아픈 결말이다. 그 아이,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던 그 아이의 추락 지점은 너무 아프다. 아이는 팔년 만에 다시 한때 자신의 교사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교사가 가는 곳은 마지막에 드디어 등장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던 미지의 누군가의 반응으로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가면 망하는 거예요."

 

그런 줄 알면서 가니까 인간이다. 필립 로스의 절필이 정말 너무 아쉬워지는 마지막 대목. 아직 할 수 있는 이야기, 어떻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고 싸면서 놓치는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끌어올릴 수 있는 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간파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이렇게 쓰는 일을 멈출 수 있는 지...

 

번역자가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 가는 길>을 덧붙인 것은 그 대목에서 제목을 따 온 작가 덕분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그 이상이다. 오늘 대학가에서 마주친 그 수많은 아까운 젊음들 앞에서 순간 아연해졌다."저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예이츠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삶은 노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결국 그곳으로 간다는 자명한 명제 때문이다. 젊음을 꿈꾸고 추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감히 노년을 상상하고 꿈꾸는 사람들은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살아가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5-11-03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가 정말 좋아요, 블랑카님. 정말요.

blanca 2015-11-04 09:3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니었으면 이 책 못 읽었을 거예요.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고 읽게 되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