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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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여섯, 직업은 없고 이혼했고 이제라도 아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환상을 품게 했던 스물다섯 살 어린 연인은 떠나갔다. 더한 것은 그는 유명한 연극 배우여서 말 그대로 전락할 고점에서 추락 지점까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것. 백오십 페이지 안에 이 사내의 전락기는 충분히 담기고도 남는다. 필립 로스가 더 이상 이야기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백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최소의 공간에 최대의 것을 담는 일은 분명 사투다. 많은 언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생의 대부분을 경험하고 이미 걸어가 버린, 그래서 이제는 전락해야 하는,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작업 안에 그의 문장은 응축되고 농축되고 결집된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 , 연극계의 명사 액슬러는 어느 날 "마력을 잃고 말았다." 더 이상 "연극 무대에 서서 완벽히 배역과 결합했던 그 환희의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그 이유없이 일어나는 몰락의 체계없는, 덧없는 과정 속에서 그는 역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성추행으로 고통받는 젊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 스치듯 지나가는 인연을 끝으로 그는 그녀에게서 남편을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듣고 그 충동과 고통에 공감한다. 한때 연극 무대에 함께 섰던 동료 연기자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액슬러는 삶의 재건을, 부활을, 다시 한번을 꿈꾸게 된다. 레즈비언이었던 그녀가 액슬러에게서 여자 연인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고 때로 빠지는 무모한 성적 충동과 욕망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그가 꿈꾸었던 것은 가장 단순하고 모범답안 같았던 아이가 있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허리가 아프고 향후 오년 안에 벌어질 일들이 도약보다는 침몰에 가까운 나이에 다가가면서 그는 오히려 부활을 꿈꾼다.

 

그의 꿈은 주관적으로 심정적으로 공감받으며 진행되는 듯하다 <에브리맨>에서의 '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처럼 갑자기 객관화된다. 어처구니 없는, 그래서 산산조각 나는. 필립 로스는 그 슬픈 반전 앞에서 언제나 가차 없다. 사랑에 빠져 늙은 아버지가 되기를 꿈꾸었던 몰락한 연기자의 죽음은 어느 순간 날아든다. 결국 절망. 섣불리 희망을, 해피엔드를 노래하지 않는 작가가 포트스잇에 "쓰기에 관련된 사투는 끝났음",을 적어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의 '쓰기'는 곧 '살아나가는 행위' 그 자체였다. 기만하지 않고 함부로 속단하지 않았기에 이제 필립 로스의 펜촉은 다 닳아 버렸다.

 

말뚝처럼 그의 몸에 꽂혀 있는 당혹스러운 경력과 마찬가지로, 그 실패도 자신의 것이니까.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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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7-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순다섯에 이제라도 아이를 얻고 싶다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blanca 2015-07-24 10:17   좋아요 0 | URL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에게는 생물학적인 자녀가 없었고 아직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소망이 충족되지 못하고 말 그대로 파멸해버리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2015-08-05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