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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인초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나쓰메 소세키는 사실 항상 별 이야기를 대단하게 풀어내는 게 아님에도 도저히 물릴 수 없는 어떤 강한 흡인력을 가진다. 톨스토이처럼 역사와 시간을 가로지르는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아니고 에밀 졸라처럼 사회 현상에 현미경을 대고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가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어떤 고풍스러운 격과 우아함을 가진다.
'우미인초'는 양귀비과의 꽃이라 한다. 항우와의 헤어짐으로 자결한 우희의 무덤에서 피어난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봄날 한철 일어나는 남녀 간의 사랑, 이별, 오해, 죽음 등이 어우러지는 이 이야기는 사실 그 눈부신 한때의 젊음과 대비되는 '죽음'으로 응결되는 것이다.
시간을 쌓아 날을 이루는 것도, 날을 쌓아 달을 이루는 것도, 달을 쌓아 해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모든 것을 쌓아 무덤을 이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p.27
이십 대 후반의 세 청년 고노, 무네치카, 오노에게는 각각 나쓰메 소세키의 일부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부잣집의 상속자지만 계산적인 계모와 영약한 여동생 후지오에 둘러싸여 무기력하게 나날을 소비하는 고노, 고노의 여동생 후지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계속 외교관 시험에 떨어져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무네치카, 사생아로 태어나 영특하지만 뜻하는 바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후견인의 역할을 한 사람의 딸과의 정혼의 약속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오노에 대한 묘사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내면에서 흔들거리는 각종 사념, 욕망, 번뇌의 형상화이기에 낯설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우리에게 잇속과 계산기를 차고 등장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아 본 기억, 그냥 일상과 현실을 소비만 했던 기억, 과거의 오랏줄에 현재를 포박당했던 슬픔 한 자락씩을 가지고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움 봄날의 정경과 각자의 고민과 번뇌들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삶 전체와 죽음에 대한 면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재능을 결박하는 것 같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후지오라는 발판을 밟고 도약하며 정혼자를 배신하려 했던 오노가 갑자기 진지함을 설파하는 무네치카 앞에서 도의와 인정으로 돌아서는 장면은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결국 보이는 형이하학적 세계에 함몰되어 헛된 것들에 끄달리는 우리들을 준엄하게 꾸짖기 위한 나쓰메 소세키의 의도인 것 같아 무게감이 있다.
"다른 사람도 나도 가장 싫어하는 죽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영겁의 함정"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결국 이 아름답고 덧없는 우미인초가 아름답고 이기적이고 욕망에 끄달렸던 후지오의 장례식장의 병풍에 나오는 것으로 귀결된다. 모든 눈부신 것들은, 모든 어리석은 것들도 종국에는 다 스러지고 만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삶은 더 멀리 더 거대하게 보일 수 있다. 눈 앞의 종종걸음으로 가닿을 수 있는 '저기'의 뚜렷한 실체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은 단단한 돌처럼 영속적이지도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 가고 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사치하게 된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시어 같은 소세키의 단아하고 유려한 언어들이 엮어내는 삶의 혜안은 사변적이지 않아 와닿는다. 즐겁고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