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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때였던가. 백과사전을 사고 덤으로 기자들의 특종 사진집을 받았다. 격랑의 현대사는 정지된 흑백의 사진으로 파노라마처럼 압축되어 있었다. 한창 뉴키즈며 듀스에 열광했던 여학생이 처음부터 진지하게 접근했던 것은 아니고 한번씩 호기심으로 사진 정도를 들춰보는 식이었다. 잘 모르는 나에게도 시위현장에서 택시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켜고 동참하는 모습은 큰 울림이 있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대학교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최루탄의 위력을 실감했던 기억 때문에 택시기사들까지 자신들의 생계수단을 가지고 나와 시위에 동참하는 모습은 낯설기도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감히 그럴 수 있었던 상황과 그들의 용기가 흑백사진 전면을 뚫고 나와 짙은 호소를 하고 있었다. 그 현장은 광주항쟁이었다.
그곳에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껴안고 우는 그의 어머니 사진도 있었다. 아름답고 부유해 보였던 사회 선생님은 어느 날 전태일 열사 이야기로 눈빛을 빛냈다. 다 알아듣고 가슴으로 공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모두 상쇄할 만큼 전태일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울 수 있는 용기와 고결함은 낯설고 저릿했다.
나는 현대사에 무지하다. 고등학교 때 국사 교과서 말미에 첨언처럼 있었던 그 간략하고 죽어 있었던 연대기는 단지 헷갈리고 무용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각자의 정치적 호불호가 마구 재단해 내는 그 '사실'들이 부담스러웠다. 광주항쟁과 전태일과 박정희로부터 나의 삶은 얼마나 멀게 느껴졌던가. 나의 사적인 삶이 결국 공적인 것의 큰 범주 안에서 무기력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각성은 죄없이 죽은 아이들과 홀로코스트에서 돌아와 기억하기도 싫었을 사실들을 책임감 있게 증언한 프리모 레비 덕분이었다. 무지하고 무관심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당신과 나의 삶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좌초 당하고 결박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의 자각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독서는 어떤 의무감과 부책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스스로를 프티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 엘리트로서 정치에서 실패하고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유시민이 자신이 태어난 1959년부터 2014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55년 동안 우리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번민하는 당사자로서의 복기와 해석, 이해에 관한 것이다. 일단 그의 출발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이다. 55년 동안 민주주의가 후퇴한 적도, 경제 위기에 봉착한 때도 있었지만 분명 우리가 비교적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있어 진보를 이루었고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고 판단한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59년 역사교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가 이야기하는 현대사는 그의 개인적 삶, 다층적 이해, 다양한 분야의 독서와 어우러져 지루하거나 난삽하지 않게 다가온다. 현대사에 거부감이나 약간의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의 설명과 참고문헌에 대한 소개는 친절하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유인이 '욕망'이었다고 판단하는 그의 시선은 위정자들의 권력욕과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지층을 가감없이 해부한다. 해방후 거대한 난민촌이었던 우리나라가 중앙집권적 경제개발을 통한 산업화의 '병영'을 통과하여 민주화 시대의 '광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유시민이 다시 읽고 주석을 달아 펼쳐내는 하나의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성장사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의 '인물'에 대한 나름의 평가이다.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의 전장 한가운데 있었던 박정희에 대한 그의 시선은 그의 생애를 통해 각인됐던 하나의 인물에 대한 애증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과 맞닿아 있다. 그 어떤 주의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고 오로지 권력욕에 사로잡혔다고 이야기하는 박정희가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함께 이루었다는 그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했던 시민 자신들의 열정, 성취, 인생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마찬가지다. 또한 이인제가 고용보험을 정착시킨 일,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짠 일 등에 대한 언급은 한 인간에 대한 단편적이고 단정적인 판단을 지양하고 복합적이고 다원적으로 정치인이나 행정가를 보는 새로운 좌표를 던져준다.
이 책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명명된다. 박정희 정권하에 산업화에 일익을 담당했던 경제관료들, 자신의 몸을 태워 오늘날의 민주화를 선물한 민주화투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어가다 보면 역사가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절로 다가온다. '레드 콤플렉스'를 정신적 병리현상이지만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려는 생존의 방편으로 이해한 대목도 설득력이 있다. 저마다 자신의 프리즘으로 간단하게 절단한 단면만을 부각시켰던 불구의 현대사가 그의 앞에서는 균형감과 설득력을 얻어 또렷이 떠오르는 느낌이다. 참신하고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그의 마지막 이야기는 문학적이다. 건조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고 이야기하는 공간을 짓기 위해 생명과 삶을 바친 이들에 대한 경의로 촉촉하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p.417
현실이 아무리 비극적일지라도 그것을 뚫고 나오는 인간의 욕망은 더 나은 곳을 꿈꾼다. 그것에 대한 신뢰가 관통하는 지점에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