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형 김대식과 법조인 출신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동생 김두식. 엘리트주의를 비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사실은 우리 기준에서 보면 최고의 엘리트 형제이다.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한풀이라면 그 또한 감정 섞인 질시, 패배감으로 폄하될 수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누렸고 누리고 있다고 보이는 이들이 그러한 것들을 솔직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가식으로 비칠 우려도 있지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형과 동생이 만났다. 형은 진영 논리에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자신은 어느 정도 보수이고 동생은 진보라는 시각에서 오늘날 대학 사회에서의 유학파 교수들의 득세와 특목고 위주의 비평준화 정서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진보 진영이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무지 몽매한 민중들을 개안시키려는 듯한 그들의 하향주의적 제스처에 일침을 가하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형이 비판하는 것은 진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진보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정당화 하는 집단의 해악이다. 동생은 주춤한다. 보수를 자처하는 형은 결국 진보진영도 그들의 엘리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터라 '평등'을 아는 그들이 마치 '평등'을 모른다고 속단하고 덤벼든 사람들 앞에서 실질적 '평등'을 저어하는 그 위선적 작태를 벌이고 있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오늘날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모순을 뼈아프게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유학이 명문대 교수 임용의 필요 조건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 교수 임용 과정에 대한 비판은 지나치게 중언부언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인데 그것에 대한 무게중심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장원급제 식의 입시 제도가 진정한 장인을 발굴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오늘날 입시 제도의 복잡함과 특목고에 대한 특혜가 평준화를 무너뜨리고 가진 자의 자식들한테 유리한 쪽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는 오늘날 각계 각처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기고 세대들의 또다른 후계자들을 키우는 역할과 다름 아니다.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 실질적 평준화가 시행되었던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학력고사 같은 계량화가 쉬운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것이 기회와 평등 측면에 더 호의적인 것인지, 학업 성적 이외의 것들의 변수의 여유를 더 주는 것이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아주 미묘하고 속단하기 힘든 부분인 듯 하다. 다만 평가 척도를 다양화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그 기준들과 척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도 노력과 비용을 요구한다면 어불성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학력고사로 갑자기 다시 회귀하는 것도 그렇다고 이러한 복잡한 입시 전형을 유지하며 요리저리 허술한 구멍을 뚫어놓는 것도 답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소수의 이미 가진 자들이 또 누리는 자들로 둔갑하는 통로로 입시 제도가 악용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살피는 노력만은 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공부논쟁'이라는 표제는 어떤 확실한 결론이나 대안을 향해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누렸던 것들에 대한 허심탄회한 자성과 비판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회 전반의 불평등적 요소를 자각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하여 유익했고 되도록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던 형제의 노력과 재기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오늘날 교육 제도와 대학 사회가 암암리에 엘리트주의에 물든 이들이 '평등'이라는 커다란 우산으로 교묘하게 자신들의 배다른 자식들을 양성하려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도덕성의 토대와 인본주의의 기반도 갖춰지지 않은 토양에서 보수냐, 진보냐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가늠하는 것은 사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