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강윤영 옮김 / 다산책방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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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닐스의 이상한 여행>에서 닐스가 새를 타고 스웨덴 전역을 여행다니는 장면보다는 초입부에 어머니 아버지가 닐스가 교회에 안 가는 대신 그날 설교 내용이 담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책상에 억지로 앉히던 장면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을까. 책상에 성경의 페이지까지 확인하여 놓아주던 어머니의 자상함과 천방지축 닐스가 느끼던 답답함, 압박감이 그 또래 피어나기 시작하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저를 이루는 애정과 뒤섞여 혼란스러웠던 그 느낌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이름도 어려운 스웨덴의 여작가 셀마 라겔뢰프는 단 하나의 어린이 소설로 나를 사로잡았다. 파란 장정의 계몽사책의 후반부에는 항상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친절하게 덧붙여져 있어 꼬박꼬박 읽었던 기억이 난다. 셀라 라겔뢰프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만 쓴 것이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도 썼는데 그게 아마 이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였던 것같다.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다고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던 터에 국내 첫 완역으로 드디어 셀마 여사의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기대했던 내용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스웨덴의 시골 베름란드를 배경으로 파계한 목사 예스타 베를링의 진지하고 낭만적인 연애담을 기대한다면 좀 황당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일단 이 책은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예스타 베를링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은 그와 그의 연인들이 삶을 더 풍성하게 인식하는 데에 부차적인 역할 정도로 그친다는 것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스웨덴의 아름답고 가공되지 않은 자연 풍광에 대한 근사한 묘사, 그곳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전설 같은 이야기들의 옴니버스, 끊임없이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두고 떠나 모험과 고난을 택하는 기사들의 방랑벽, 기사들을 거두어 먹이고 마을 전체의 경제를 책임지다 시피했던 소령 부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다층적인 인식 등이 보물 꾸러미처럼 펼쳐진다. 흔히 남미 소설들을 거론할 때 단골로 등장했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색채가 이 작품에서는 또 북유럽 식으로 재창조되어 현란하게 구현된다.

 

주인공 예스타 베를링도 그를 둘러싼 주위 인물들도 절대 선이나 악으로 조악하게 감침질되지 않는다. 예스타 베를링은 근사한 사내였지만 술독에 빠져 목사직에서 파면 당하고 브루뷔의 언덕을 떠돌다 옛사랑을 잃었지만 그 사랑이 남긴 재산과 지헤로 마을 전체를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삼셀리우스 소령 부인에게 의탁하게 되며 그녀 아래의 기사들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악의 현현 같은 사악한 지주 신트람에게 속아 소령 부인을 쫓아내고 기사관을 차지하게 된 기사들은 예스타 베를링을 둘러싼 경솔한 연애 사건에 일조들을 담당하면서 좌충우돌 마을을 말아먹게 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예스타 베를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사들의 실수 투성이의 삶에 대한 다양한 만화경이라 해도 될 듯하다. 예스타 베를링은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고 기사들은 끊임없이 집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기사관으로 돌아오는 그 회귀의 도정에서 방황한다. 하나의 긴 이야기는 여러 장의 작은 이야기들 자체만으로 역동성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열하고 인정머리 없기로 유명한 브루뷔의 목사가 자신의 옛사랑이 죽음을 앞두고 젊은 시절의 연인을 추억하러 왔을 때에는 가장 정열적이고 진심어린 늙은 청년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아들의 죽음 앞에서 죽음이 가지는 아름다운 종결의 의미와 초자연적인 느낌을 섬세한 언어로 되뇌이는 어머니의 이야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 기사가 이른 새벽 첫 햇살이 나무들 꼭대기에 불타고 있을 때 살그머니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했다 머무르지 않고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 하나 모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나의 퀼트 작품을 연상시킨다. 이야기의 화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작 가장 마지막 문장으로 응축된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나 역시 같은 대답을 해도 될까? 지금까지 환상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벌들이 우리 주위를 내내 맴돌았다. 이 벌들이 어떻게 현실이라는 조그만 벌통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잘 살필 일이다.

- p.536

 

다 거짓부렁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삶과 나 자신을 잘 살핀다면 우리의 삶도 이처럼 환상을 현실 속에 꼭꼭 잘 눌러담는 능력에서 그 행복이 판가름나는 게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는 좋은 안내 지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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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그러니까 제가 생각했던 그런 내용이 아니군요! 제인 에어 같은, 폭풍의 언덕 같은, 오만과 편견같은, 그런 로맨스 소설은 아니란 말이구요. '마술적 리얼리즘' 이라니, 저는 그쪽에 취약한데, 이 책이 그런 내용이었군요. 고마운 리뷰네요, 블랑카님.

blanca 2013-06-07 11:1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도 사실 그런 류인줄 알고 읽다가 그만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도 어찌 어찌 읽아 보니 아주 독특한 즐거움이 있었어요. 저도 사실은 마술적 리얼리즘과 잘 안 맞는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류에 순수하게 몰입이 안 돼요. 그래도 이 책은 아주 참신한 즐거움이 있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3-06-05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닐스가 탄 새가 기러기더군요. 시골 살 때 이웃에 거위가 있었는데 그 주인이 "기러기를 길들인 게 거위"라고 해서 아하...그렇군 했죠.

blanca 2013-06-07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찾아보니 기러기더라고요. 기러기를 거위가 길들였다니 신기하네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3-06-0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러기를 길들이면 거위가 된다는 얘기였어요.야생기러기를 사람이 잡아 집에서 가금류로 길들였다는 얘기죠.설마 기러기를 거위가 길들였을라구요~

blanca 2013-06-09 17:58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무식이 탄로났군요 ㅋㅋ 신기하네요. 결국 거위가 기러기군요.

노이에자이트 2013-06-10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기러기 사진과 거위 사진을 비교하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을 거에요.
그런데 거위를 실물로 보신 적이 있나요? 거위를 안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요.

blanca 2013-06-11 09:32   좋아요 0 | URL
아마 본 적이 있을 거예요. 기억은 정확히 안 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