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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평점 :
열여섯 살. 언덕 위를 힘겹게 기어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 속, 손잡이를 잡고 몸을 흔들며 생각했다. 시간은 대체 왜 이렇게 안 가는 걸까? 빨리 스무 살이 되어야 할 텐데. 창밖을 내다 보아야 언덕 위로 다닥 다닥 붙은 집들과 바다 같은 하늘이 다였다. 그런데 세상은, 지구는 꼬마 같은 여자애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불가항력이라는 말 자체를 떠올리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우리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난 줄 알았고 나의 꼬부랑 할머니는 귀밑 머리 땋고 얼굴 붉히던 소녀 시절을 가져 본 적이 없었을 거라 여겼다. 이제 버스를 타고 몸을 흔들며 내다보는 세상은 온갖 불가항력으로 덮여 있고 시간은 무참히 빠르다고 느낀다.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세상은 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불평한다. 살아갈수록 지구에서 내가 그리는 궤적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간다. 세상은 더 커지고 나는 외려 더 작아진다. 인생이란 세상이란 이런 걸까?
인생( 이 말은 그 당시 문학이나 정치에서처럼 매우 자주 그들의 대화에 등장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대문자로 쓰여 있다)은 그들 앞에 하나의 객체로, 마치 그들의 자유로운 감성을 위한 그리고 지적인 호기심과 감성적인 성취를 위한 전장으로서, 그들이 결코 경계를 알지 못했던 것들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 앞에는 모든 길들이 끝도 없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이러한 길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발도 내딛지 않을 테지만(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어떤 길을 택하든 자유이며, 이 길에서 저 길로 가로질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인생에 대한 황홀한 의욕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p.348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젊음에 대한 통찰이 예리하다. 게다가 그 젊음들은 터키인, 기독교인, 유대인들로 민족도 종교도 신념도 공유할 수 없는 이질감에 부대껴야 한다. 발칸반도. 고등학교 지리시간 목이 짧은 지리 선생님은 백묵으로 칠판을 치며 "유럽의 화약고!"라고 이곳을 호명했다. 월드컵 때 몬테네그로라는 나라를 온전히 외우고는 혼자 으쓱했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발칸 반도는 축구는 잘 하지만 별안간 시끄럽고 어렵고 혼란스러운 곳으로 폄하된다. 싸움의 틈새에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는 실종된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들. 여기에서 태어난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를 가로질러 흐르는 드리나 강의 다리가 지켜보는 인간의 역사를 재건한다. 1516년 터키 제국의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고향을 떠났던 정치가 메흐메드 파샤 소콜리가 유년의 상흔을 드리나 강의 다리를 세우면서 치유한 때부터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1914년 드리나 강의 다리가 무너지기까지의 400여 년의 연대기 안에서 결혼식 날 드리나 강에 몸을 던진 어여쁜 신부, 이교도에 항전을 반대한다고 같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드리나 강 다리 카피야의 대들보에 오른쪽 귀를 못밖여야 했던 알리호좌, 아름다운 터키 소녀에 잠깐 한눈을 팔다 그 열정의 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던 젊은 군인, 비셰그라드 주민들 뿐 아니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친족들의 생활까지 지치지 않고 돌보았던 유대인 처녀가 지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더없이 존귀한 존재들이고 나름대로 주어진 시간을 겸허하게 채우며 삶을 살지만 내일이 당연히 오늘 같을 거라고 여기며 사는 나날들은 때로 거대하고 사악한 흐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도 한다. 사고, 병마, 배신, 자연재해, 전쟁. 100년만 지나면 나의 이름을, 나의 노력을, 나의 꿈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무기력하고 이렇게도 허무한 인생.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스산해지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 단지 거기에서 추억되고 이야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작가의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인간 세기의 반 이상을 일하고 절약하고 염려하고 돈을 벌면서도 개미 한 마리도 밟지 않으려고 주의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며 똑바로 자기 앞만 내다보고 소리 없이 돈만 벌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산적처럼 두 명의 군인 사이에 앉아서 포탄이나 그 밖에 어떤 것들이 다리를 해칠 때면 그 이유로 그의 목을 베거나 총살할 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중략>
그런 거지, 그런 거야. 상인 파블레는 혼자 중얼거렸다. 모두들 너에게 일하고 저축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강요하지. 교회와 정부와 너의 타고난 이성도. 너는 그 말을 듣고 신중하게 길을 가며 바르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사는 게 아니라 일하고 절약하고 걱정하고 하는 동안 너의 평생은 그 안에서 지나가버리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어져서 세상이 이성을 비웃고 교회는 문을 닫고 침묵해버리며 정부는 힘없이 되어버리고 정직하고 피땀 흘려 돈을 번 사람들은 잃게 되고 빈둥빈둥 세월을 보낸 자들은 얻게 되지.
-p.457
상인 파블레의 일생은 우리의 일생이기도 하다. 상인 파블레의 최후는 우리가 가장 겁내하는 마지막 모습이기도 하다. 이념, 종교, 민족은 정작 그것들에 대해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무리들이 단지 자신들의 권력, 명예,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돌연 강고한 경계를 가지게 된다. 갑자기 그 경계는 도덕과 비도적, 정의와 불의의 그것으로 탈바꿈한다. 18세기 후반 대홍수가 났을 때 터키인들과 기독교인 유태인들은 한곳에 모여 서로를 다독였던 모습은 이제 하나의 전설처럼 남고 말았다. 드리나 강의 다리가 4세기를 지나 돌연 무참히 무너졌던 것처럼 그들이 나누었던 인간적인 연대와 공감은 흔적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이야기가 묻힌 곳에 증오와 반목은 다시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여전히 미워하고 심판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불가능하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영원한 건축물을 세워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영원히 이 세상 어디에서든 자취를 감춰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p.471
있을 수 없는 일. 단 하나의 희망까지 저버리는 일. 이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파괴와 약탈이 자행되더라고 어느 한 곳에서는 반드시 위대하고 존엄한 정신이 자라나 거기에 끊임없이 항거하고 투쟁하고 건설하는 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 그래,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