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뭔가를 좀 알까 싶은데 이런 앎의 유효 기간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다. 우리는 뭔가를 향해 평생을 달리기도 하는데, 그 종점은 어처구니없게도 죽음이다. 이런 부조리가 또 있을까. 모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뭔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 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더 나이 들어 노년의 삶을 사는 사는 사람들은 이런 부조리와 실존의 비극을 어떻게 삶과 화해시킬 수 있는 걸까. 종점이 뻔히 보이는데도 일상을 충실히 영위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존경스럽다. 내게는 각자의 고단한 운명을 감내하며 묵묵히 살다 죽는 일 자체가 영웅적인 행위로 보인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세부 속으로>는 예일대 문학상 재단에서 출판하는 '나는 왜 쓰는가' 시리즈 청탁으로 완성된 책이다. 통상, 이런 테마 선집 청탁에 의해 나오는 책은 아무래도 기대되는 틀 안에서 작가의 또렷한 개성이 발휘되기 힘들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리디아 데이비스의 이 책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칠십 대의 노작가가 자신의 쓰는 일의 의미를 풀어나가며 대뜸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책, '수레바퀴 제작인의 작업실'을 들이민 것은 큰 복선이었다. 독자와 시대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는 우직한 내 세계에 대한 천착과 기록이 결국 '쓰기'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이 모든 쓸모없고 작은 것들의 가치는 결국 죽어 사라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뭔가에 몰두하고 사랑하고 시간을 들이는 삶의 그 무용해 보이는 아름다움과도 만난다. 젊은 시절 처절하게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는 <굶주림>을 써냈던 크누트 함순이 말년에 <풀이 무성한 오솔길에서>의 일상의 산책기를 툭 던져 놓고 가장 중요한 재판의 결말은 밝히지도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그 무심함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수용시설에서 130킬로(13킬로가 아니라)미터를 걸어 집으로 갔던 존 클레어의 시에 대한 이야기는 언뜻 이 책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공명한다. 


결국 좋은 에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원대한 사회학적 장광설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 미시사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그 누가 독자로 와도 개인적인 읽기가 가능한 글 말이다. 사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듯하지만,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테마를 불러내는 작가의 필력에 처음부터 끝까지 마법처럼 걸려들었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책 안에서 인용한 이 짧은 민속시가 이 책 전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빨간 털실로 이 손모아장갑 뜨기를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

장갑은 이제 완성했지만,

내 인생은 끝나버렸네.

-러시아 민속 시(세부 속으로-리디아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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