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를 하면 주위에서 저를 좌파라고 합디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걸핏하면 빨갱이라고 한다니까요.  

요즘은 그런 표현은 안씁니다. 옛날 얘기죠.

2차선 도로를 인도를 넓히면서 갑자기 1차선으로 만들어 버려 온갖 교통혼잡을 야기한 것을 불평하다 지방선거 얘기, 북풍몰이에 대한 비난 등 처음 만난 기사와 승객은 서로를 알아보고 신나게 시국토론을 하다 갑자기 그 대목에서 불일치를 봤다. 기사 아저씨의 나이는 대략 육십 대 어름으로 보였다. 빨갱이. 좌파. 더 많은 얘기들은 하필 그때 목적지에 당도함으로써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빨갱이. 우리는 언제쯤 이 용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적색 경계 경보를 울리면 우리는 언제나 얼마쯤 주춤한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각을 세우는 부분도, 그리고 언제나 돌아오고 마는 원점도 이 지대에 있다. 레드 콤플렉스는 한반도 내에 그 이념을 체화하겠다고 진군했었던, 하지만 결국 파시즘적 공통 분모를 결과론적으로 가지게 된 저들과 완전히 통합하거나 치지도외하거나 하지 않는한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들어붙을 수 밖에 없는 망령이다. 

70년대 말에 태어난 나도 결국 유년시절부터 반공이념을 주입받은 세대다. 삐라를 주워 경찰서에 갖다주며 으쓱했고,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반공 표어와 포스터로 모범적인 어린이로 인정받고자 했던 기억이 뿌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 그런 인위적인 적대감의 주입은 하나의 에피소드 이상으로 남아 있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의아했던 것같다. 대체 왜. 왜 이다지도 그런걸까, 싶은.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사람의 체취를 불러오고 왜 그다지도 그들이 그 사상에 도취되어 투신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한참 후에야 소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빨치산들의 그 몽상가적이고 이상주의자적 면면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국 일제 강점기의 항일투쟁과 해방기의 토지개혁과 맞물려 있음을 서사를 통해 체현한 대목은 거의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을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북한정권으로부터 거꾸로 출발할 것이 아니라,일제치하 중국으로 추방, 혹은 도피한 독립운동세력들이 그 운동의 동인으로서의 이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차용측면에서의 이해, 중국의 항일투쟁과 연합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인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또한 해방기 농지재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친일파들의 처단 들과 조우했던 지점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 미군정하에서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통치 체제에 친일파들을 등용함으로써 그들의 콤플렉스가 반공주의의 불꽃을 점화하는데 은밀한 역할을 했음도 마찬가지다. 

때마침 우연찮게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있었다.  

 

 

내 전생애는 실패했지만, 단 하나 나 자신에게 승리했다고 자평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가 중국 공산 혁명에 뛰어들어 항일투쟁을 하는 와중에 처음에는 리리산주의자, 심지어는 우파, 마지막으로 조선인이라는 딱지로 어떻게 폐기처분되는 지를 어떻게든 납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또한 오늘날도 그렇게 한 인간에 각종 이념적 꼬리표를 막무가내로 붙이는 그 염증스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슬픈 체념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평양 교외에서 가난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에 이미 조선독립군 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국외에서의 항일투쟁은 테러리즘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혁명은 잔혹성 속에 진실을 건져 올리는 일과 다름아니었다. 그들은 이상주의자기도 했지만, 삶과 역사가 박애와 그 인연이 없음을 절절하게 응시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영화 부활을 보면서 엉엉 울었던 김산은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하나의 정적인 관성의 체현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역사는 꿈틀대는 용틀임이었고, 하나의 생명이었기에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체제를 종식시키고 금덩어리같이 귀하게 여겨졌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오는 일은 투쟁과 직결되었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 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 진 가지에 목이 매여 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 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p.60~61 

우리가 전통민요 정도로 알고 있는 아리랑은 이런 피압제민들의 응어리진 애환과 한, 체념서린 수런거림이 퇴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마지막으로 벽에 손톱으로 아리랑 가사를 긁어 놓은 것에서는 비감어린 뭉클함이 전해져 왔다. 저항하고 투쟁하다 결국은 넘고야 마는 죽음의 고개. 그러나 그 고개를 넘어간 이들은 김산이 얘기했던 것처럼 눈앞의 승리를 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역사 자체로 녹아들어가 결국 승리하고야 말았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다 분파주의, 파벌주의에 이용되고 희생되어 결국 고국의 해방도 미처 못 본 채 눈감아 버린 수많은 저들의 피어린 삶들은 그 자체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호흡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자잘한 편린 들 속에 그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던지는 시선들, 우리가 하는 행동들, 우리가 내뱉는 말들 속에 그들의 유지는 체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산은 옳고 그름의 분계선이 유동적이라고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올바른 평가에 도달하는 과정이며 또한 그러한 진동 자체가 변화를 낳는 요인이라고 강조한다. 간직하고 싶은 얘기다. 

누군가를 비판하면서 그들이 개념없이 사용하는 감정서린 뒤틀린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억울함을 토로한 나의 모순을 반성한다. 그 기사분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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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0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7 0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0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 뭔가 체계를 만들어가기도 전에 6.25라는 전쟁을 겪고, 통일을 겪지도 못하고 미군정의 영향탓으로 애매하게 나라의 뼈대가 만들어진 것.

그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꿰매지지 못한 상처들 속의 고름은 과연 언제즘 없어지게 될까요..?

시간이 더 지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blanca 2010-06-06 22:13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누구나 자기 자신은 특별하게 느끼겠지만 우리 민족은 특히나 아주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상흔이 다 아물기 전에 진정한 화해나 통합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