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서 방영한 법정 스님 관련 스페셜의 아련한 잔상과 오월을 머금고 돌아온 아카시아 향기가 만들어 준 고적한 밤.
 

인간의 미덕에 대한 최후의 마지노선마저 무너뜨린 나치점령하의 집단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안온한 행복의 거름으로 당겨쓰는 행위를 제일 치사하다고 생각하건만 아카시아 향기가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금' 행복하다고, 살아있는게 좋다고 느꼈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했다.

 

행복하여라, 훌륭한 아파트나 누추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진 채, 홀로 앉아 꿈꾸고 울 수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형이상학적 문제를 두고 스스로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타인의 돌봄을 받는 환자들이여!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자들이여,
그리고 또 행복하여라, 그대들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냐,
병원의 침대나 저택에서 정상적인 생을 누린 끝에,
정상적인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여!
-마우렐(본문 중 인용) 

추억으로 아로새겨진 과거를 의식적으로 망각하고 감히 내일을 떠올리지도 못한 채 엄혹한 참경을 직시하고 같은 인간이 행하는 패악들을 견뎌나가 마침내 그것들을 증언하기 위해 돌아온 자들의 얘기다. 마흔에 요절한 저자 테렌스 데 프레가 나치와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을 채집하고 그것을 문학적, 심리학적, 철학적으로 재구성한 역작은 34년이나 삶의 지주로 이 책을 품어왔던 역자의 노고에 힘입어 한층 빛난다. 암투병중인 역자는 이 책의 서문만 세 번을 쓴다고 했다. 유신의 군사체제하 햇병아리 수습기자로 처음 접하게 된 이 책은 그의 삶의 굴곡직 서사를 돌아와 아직도 살아있다,고 자신을 표현하기에 이르른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기록을 보존하려는 욕망처럼 강한 것은 없다 

살아돌아온 자들은 강렬한 증언의 욕구를 얘기했다. 고통의 아로새겨짐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세상을 향해 토해내기를 부추겼다. 질병. 궁핍 속에서도 이 시기의 모든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려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만오천 명을 하루에 처형한 트레블랑카 집단 강제 수용소에서는 그곳의 기억을 보존하고 참상을 세상에 증언할 한 두 사람을 세상밖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산 자는 죽은 자들에 대하여 빚진 바를 청산하고 그들을 자신을 통해 복원해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들이 증언하려고 하는 대상으로서의 이 세계가 그들이 고발하려고 했던 조건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이 증언이 가지는 시사점을 보여준다. 증언은 곧 문명의 전진이 어떻게 생명의 존귀함을 교묘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진실을 얘기하려는 것이 일차적인 본능이라면 이 본능은 결과론적으로 이 지향하는 세계와 살고 있는 세계의 그 간극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모색해야 하는 인류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씻는 데 실패한 자는 죽는다. 

신체의 생리적인 작용을 학대와 조롱의 대상으로 의도적으로 이용했을 때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대한 참혹한 보고의 대목이다. 또한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에서 뚫고 나오는 체면을 지키고자 하는 마지막 저항이 어떻게 생의 의지로 승화되고 결과론적으로 생존의 승률을 높이는지에 대한 통찰은 놀랍다. 극한 상황에서는 신체와 정신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자신의 모습을 관리하지 않는 것이 곧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뚫고 나가지 못해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마다의 고통의 시기를 지나가게 된다. 이 기간은 흔히 자신의 신체를 돌보지 않고 혹은 학대하기 쉬워진다. 심적인 위기에서 육체는 하나의 거추장스런 부산물로 치부된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서는 되레 심신의 구분의 철책이 무너져 묘한 상호순환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깨달음은 우리가 처할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하는 지에 대한 강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슬프고 괴롭다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술과 담배로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음을 기억해야 겠다. 화장실에 갈 최소한의 자유도 얻지 못한 채 용변을 서서 흘리고 다녀야 했던 그들도 매일 세수를 하고 신발끈을 묶으며 외모를 가꾸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런 자들은 살아 나왔다. 

 

그럼에도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의 의지의 촉발 

재소자들이 초기의 수용소 생활을 접했을 때 받은 충격이 자아의 붕괴로까지 이어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해체와 붕괴는 상당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통합과 회복으로 승화되는 신비로운 메커니즘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사방에서 넘쳐 흐를 때 사람들은 절망의 심연에서 생의 의지를 회복했다. 특히나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별이 총총하던 어느 날 밤, 한 노인이 구슬프게 불렀던 노랫소리에 다들 귀를 기울이며 감동받아했던 체험을 얘기하는 생존자의 증언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보존되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 같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수용소에서의 집단 생활은 아귀다툼을 연상하게 한다. 서로를 불신하고 배척하고 배신하고 짓밟는 참경들. 그러나 여기에는 기적이 있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카오스와 아노미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떤 개인의 요행이 아니라 집단적 성취였다. 점호시간 쓰러지면 총살이었다. 그러나 비척대는 재소자는 앞뒤로 받쳐주는 이들 덕택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심지어 생일날 자신의 자리에 사과와 낡은 칫솔을 누군가가 선물로 두고 가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를 지켜주며 버텨냈다.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무수한 작은 아름다운 모습들이 연출되었다. 벌겨벗겨지고 머리를 박박 깎고 오물이 엉긴 몸으로 그들은 서로 빵을 나누어 먹고 어린이들을 끝까지 온전하게 지켜내었다. 이 지옥에서 그들은 주린 배로 질서를 짜 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연대는 요원하거나 이상적인 지향이 아니었다. 생명 간에 열린 틈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배려와 지지가 인간의 존엄을 사수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우리를 거대한 하나의 가족으로 결합시켰다는 생존자의 증언은 가슴께를 둔중하게 울린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집단 강제수용소의 체험은 정신분석학적, 행동주의적 해석이 주류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시각은 지극히 1차적인 적응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유아적 퇘행 등으로 설명되는 이 대목은 그들이 2차적으로 통합,보수,극복의 모습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간과한 것이다. 땅에 밀착하고 생존 그 자체로 집결되는 그 의지들의 출현에 복잡다단한 의미를 덧붙이는 것도 경계한다. 생명이란 그저 우리의 몸속에 있는 원형질적 자기 보존력인 것이다. 숨쉰다는 것이 가지는 그 단순한 마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분투한다. 

 

집단수용소 자체의 해석 

이 책이 훌륭한 것은 재소자들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가해자, 집단수용소 자체의 출현에 관한 통찰력 있는 고찰이 있다는 것이다. 집단 수용소가 인류의 예술, 문학,신학 가운데 악마적 요소를 추출하여 신중하게 재현한 것의 사례로 제시되고 파괴,고통, 상해와 모독을 향한 극단적 상상의 정당화,합법화의 가장 잔인한 예시로 해석되는 것이다. 두렵고 패악스러운 것들을 꿈꾸면서 어느새 그것을 현실 속에 재현하는 데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은 소름끼친다. 또한 죽음을 강하게 부정하고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여 인식하고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지향하는 문명의 발달이 인간 그 자체의 명징한 생명력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 지에 대한 지적은 날카롭다. 우리는 몸을 상품화하면서도 비하하는 묘한 딜레마의 질곡으로 묶어 버렸다. 이미지화되어 소비재로 탈바꿈시킨 몸은 인간 그 자체를 도구화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 지 짚어볼 일이다. 아름다운 몸을 숭상하는 것이 그 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지독한 다이어트로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례들은 하나의 예증 같다.  

 

살아 돌아온 자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

우주의 다른 모든 것은 하향 운동을 하는 반면 생명만이 상향운동을 한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갈구, 삶에 적합한 어떤 소질 같은 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생명 자체에 원형 보존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얘기는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여 살아 남아온 생존자들을 통해 터득하게 되는 하나의 거대한 메시지다. 자크 모노는 모든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는 하나의 화석이며 그 내부 단백질 입자 하나 하나마다 조상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 속에도 지옥을 뚫고 돌아온 생존자들의 핏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생명은 끈질기게 공생하고 살아남고야 만다. 그 존귀함을 또렷하게 응시할 때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해야 할 지에 대한 단순한 해답을 알아차리게 된다.  

순간 순간 우리는 행복감을 가슴 깊이 들이마실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 내어 내 가슴 깊은 곳 작은 여백에 눈물을 채울 수 있다. 그게 지금 살고 있는 우리가 끝내 죽어간 자들, 그럼에도 살아 돌아온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생명은 생명을 덜어 먹고 사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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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2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번에 학교 과제물 때문에 집단 심리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어요. '악의 평범성'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우리처럼 평범한 누구라도 압력과 분위기가 조성되면, 조종당하여 악과 범죄를 저지른다는 거여염.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 만이 그에 저항하여 선을 행한다는거지요. 집단 수용소의 피해자는 그 반대겠죠. 살아남고자 거기에 집중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거죠? 참 대단하고 존경스러우면서도 죄스럽습니다.

우리는 현재 무의식적으로 어떤 집단에 수용되어 어떤 피해자를 만들고 있을까요?

blanca 2010-05-24 18:3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집단심리라는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니.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칩니다. 희망을 가지고 그래도 내일은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나가야 겠지요. 오늘은 감기에다 인터넷만 보면 심란하고 화나는 소식에 날씨까정. 아주 대박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5-24 19:21   좋아요 0 | URL
아아.. 블랑카님이랑 나랑 전생에 쌍동이 아니었을까요?

저도 동일한 이유로 대박입니다, 오늘. 감기 몸살 + 뉴스 승질 + 개인적 화나는 소식 + 날씨 짬뽕.
액땜이나 하러 어디 한번 가야겠군요, 둘이~ ^^

blanca 2010-05-24 22:41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게다가 말안듣는 아기까지--;; 약먹고 헤롱대는데 밖으로 나가자고 한바탕 울어대는데 분노의 게이지가 급상승하더라구요. 아, 진짜 여름에 한번 얼굴 보며 얘기좀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