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의류몰. 길쯤한 팔다리에 마론인형처럼 요요하고 무심한 얼굴의 모델이 베이지색 가디건에 심하게 타이트한 스키니진을 입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고 있다.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설명은 하나의 첨언 같다. blanca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펑키하고 빈티지한 스키니진을 입고 만날 사람과 갈 장소가 있는지를. 단조로운 일상에서 사이다캔의 뚜껑을 따면 뿜어져 나올
탄산의 그 톡 쏘는 상큼한 첫맛을 그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스키니진은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이윽고 기다린다.
무 엇 을. 택배 아저씨를. 그를 기다리는 시간들은 특별한 설레임으로 채워진다. 그 스키니진은 blanca의 그 날이 그 날 같은
빈곤한 서사의 삶에 다채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인터넷 쇼핑에서 얻은 주된 기쁨은 서사의 환각이다. 그 스키니진을 입는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통째로 개조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이야기로의
전진에 대한 기대로 그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생활들에 대한 선망을 포착해 낸 의류몰의 사진작가에게 포섭되고 만다.
다음에는 어쩌면 그녀는 드레시한 미니원피스를 입은 그 마론 인형 같은 모델에 또 굴복해 장바구니를 두둑하게 채울지도
모를 일이다. T.P.O에 맞는 의복을 입으라는 그 주문은 어쩌면 선후가 전복된 음모일 수도 있다. 먼저 옷을 소비하고
그 옷을 입고 갈 적소를 만들어 내라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젊은 여자들의 적소를 찾아내지
못한 그 옷들에는 언젠가는 그 거죽만으로 주인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는 그 헛된 망상 속에 선택되어지기를 기다리며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꿉꿉양은 매일 퇴근후 친구들 미니홈피들을 순례하며 그녀들이 업데이트한 사진들 밑에 의례적인 경탄을 두서없이 주워섬기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런데 로그아웃후 느끼는 그녀의 비애감과 새로운 욕망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남편이 사준 물품들을 하루 걸러 전시하는 것이 낙인 친구 나공주가 자랑했던 아이폰은 원래 가지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난 김에 내일 점심시간에 질러야 겠다고 결심하고 나공주의 그닥 이쁘지 않은 사내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크는 것을 보니 결혼 얘기를 무슨 금기어의 주변부에 있는 것 마냥 부담스러워하는 뚝뚝군에게 하루바삐 결혼에 대한 확답을 받아둬야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여기에 오니 갑자기 신경질이 스멀스멀 치밀어 오른다. 나공주는 나보다 얼굴도 못나고 공부도 뒤졌는데 치기로 지원한 과가 하필 미달이었던 바람에 쉽게 합격하고 난 그 다음에는 인생이 무슨 반전 드라마를 보여주려고 작심한 마냥 착착 풀려댄다. 분명 친구인 것은 맞는데 잘 되면 한마디로 심하게 배가 아프다. 어찌 됐든 꿉꿉양은 내일 아이폰을 사고 저녁에 뚝뚝군을
만나 신경을 긁어대는 것으로 지금의 불쾌감을 좀 희석시켜야 겠다고 결심하고 이런저런 상념의 아퀴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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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모든 욕망들. 시기들. 이건 온전히 꿉꿉양의 것일까?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는 세 딸이 각자의 욕망의 기준을 따라 혹은 그것에 휩쓸려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어떻게 뒤틀려 가는지를 아버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기실 욕망의 스펙트럼은 아버지의 그것에 의해서도 뒤틀려 굴절된다.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환상으로 덧씌어진 미완의 동화를 아버지는 딸들을 통하여 완성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맞이하는 충격적인 결말이 남기는 그 지독한 공허를 채워주는 것은 뜻밖에도 해설이다. 말줄임표의 소설에 간결하게 마침표를 찍어주는 그 명쾌한 해설 안에는 새로운 텍스트가 구원처럼 날아와 앉는다.
르네 지라르가 <낭만적 허위와 소설적 진실>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대로 인간 욕망은 많은 경우 경쟁자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중략>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는 우리의 욕망이 이처럼 모방된 가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욕망에 의해 구축된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휘청거리는 오후> 정호웅의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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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나만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고 매달렸던 욕망마저 나만의 것이 아니라니. 결국 우리는 누군가가 또 누군가에게서 복제해 온 가짜 욕망의 달성을 향하여 질주하고 시달리고 좌절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물질을 소비함으로써 소통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소통의 장과 내러티브를 창출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더 나아가 누군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그 욕망의 발로에 이르기까지 그 허술한 착각과 환각의 세계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나만의 것을 찾아낼 수 없다. 찾아내었다고 믿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것이 아니었다,고 도리질까지 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슬픈 마리오네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자명한 대답이라도 듣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