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우울증 -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크리스토퍼 레인 지음, 이문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생리 하루 전 우울감은 바닥을 쳤다. 체호프의 <슬픔>에서 그 단어만을 우울로 치환하면 나의 얘기였다. 나의 가슴을 찢고 그 우울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온 세상이 잠길 정도였다. 우울은 분노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얘기를 체현하듯 사람마다 분노를 자아내는 그 자질구레한 역겨운 구석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무언가가 흐르면서 갑자기 그 우울감도 바닥에 가라앉고 다시 예의 그 단순한 나의 감수성이 되살아나 즐거워할 구실을 찾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월경전불쾌증후군 아니, 이 책에서는 불쾌장애라고 시니컬하게 명명되어지지만 그것을 경험하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을 아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울감의  벼리는 바로 무서운 고독감이다. 소통을 갈구하는, 아니 소통을 갈구하라고 내모는 사회에서 다 웃고 있는데 혼자 울고 있는 것 같은 그 소외감은 치명적인 고통스러움을 동반한다.  

<만들어진 우울증>수줍음 같은 일상적 감정을 심리적 갈등이나 사회적 긴장이 아니라 뇌의 화학적 불균형이나 신경전달물질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약물치료라는 단순하고 근시안적 해결책에 집중하는 미국의 정신의학계와 또 그것과 필연적으로 유착되어 있는 다국적제약회사들의 상업적 흑심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개성에 대한 억압이 사회 전체의 규범 강요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짚어주고 있다.  

특히 저자 크리스토퍼 레인은 미정신의학협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이하 DSM) 개정작업을 주도한 로버트 L.스피처 박사가 환자들이 호소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적응행동을 정신질환으로 범주화하는 데에 골몰했다고 지적한다. 실제 DSM의 진단 매뉴얼에는 인터넷 중독, 강박적 구매장애, 폭식 장애, 월경전불쾌장애를 추가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이 매뉴얼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과반수가 정신장애를 앓고 있어 시급히 SSRI류의 약물을 투여받아야 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사실 이 책은 미국의 약물만능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실정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다. 기분의 불균형에 대한 시급한 치유책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서구인들과는 달리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권의 문화는 우울하다,거나 분노가 치밀어오른다,는 감정의 발로 자체에만도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 감정이 휘몰아치는 불균형 상태도 병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부정적 기질이나 불운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도 정신의학계 의 미국의 진단매뉴얼 도입과 다국적제약회사의 공격적인 마케팅 등으로 가파르게 그들의 약물신화에 경도되어 가고 있다. 비근한 예로 남발되는 ADHD 진단과 그에 따른 빈번한 약물투여만 봐도 그렇다. 이제 우리는 공공장소를 쿵쿵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내아이들을 활발한 기질이나 훈육의 부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치료가 필요한 아픈 아이로 보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전적으로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지만 어느 쪽으로든 과하게 닮고 치우치는 경향성은 위험을 담보하고 있다.  

약을 팔기 전에 병을 팔아라! 다국적 회사의 항우울제 마케팅의 그 교묘하고 은밀한 공격성은 경악스러웠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우울감을 장애로, 질환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나면 그 진단 사이클은 자체 순환하게 되어 있다는 얘기. 놀랍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울증 자가진단 매뉴얼을 쉽게 접하고 거기에 체크해 가며 스스로를 우울증 환자로 자가진단하는 풍경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 광고는 마치 공익 광고같다. 수줍어하는 아가씨와 직장 업무에서 좌절하는 젊은 남자의 좌절감을 쓰다듬어주고 마법의 신효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가만히 이 광고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은 일상적 감정이 아니라 장애라고 속삭이고 스미스클라인의 팍실이라는 약물을 투여받을 것을 교묘하게 설득하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미에 조너선 프란젠의 <교정>의 인용은 웅변적이다. 

"정신 '건강'이란 소비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야. ....... 돈을 소비하려는 욕망의 부재는 값비싼 약물치료가 요구되는 질환의 한 증상이라고." -p.289 

저자가 현 미국의 약물투여가 성형 정신약리학으로까지 변질되었고 이 약물들이 인격조작이라는 극단의 환상까지 키워가고 있다고 성토하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구성원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적 기질을 용인해 낼 수 없는 국가의 전체주의적 강요와도 맞물려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치가 드러난다. 이 책은 단순히 프로이트와 이별한 미국의 정신의학계의 기계적인 정신질환 분류표 작성과 제약회사의 상업적 흑심만을 비판하는 그렇고 그런 대안없는 욕쟁이 할멈이 아니다. 환자 개개인의 고통의 그 심층적인 심연에 대한 이해 대신 쉽고 간편하게 매뉴얼에 그 환자의 증상을 귀속시킴으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치료 풍토와 사회적 규범의 틀 안에서 그것의 내재화에 순응하지 않는 수많은 외톨이들에 대한 강박적 따돌림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으로 나아간 그 지점에서 저자의 인간애의 지평은 확대된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몸이 아픈 사람과 같이 배려받고 치료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데에는 극렬히 동의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특이한 기질을 가졌거나 조직에 융화될 수 없는 몇 몇의 특별한 사람을 내치는 데에 둔감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개인들이 느끼면 사회는 휘청거린다,는 올더스 헉슬리 소설 속 얘기처럼 우리는 느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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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n't. I just can't.

제가 저 광고와 저 구절을 얼마나 연속적으로 많이 떠올렸는지! 그런데 이런 것이었는지!

blanca 2010-02-12 09:47   좋아요 0 | URL
Jude님 저 광고 어디서 보셨어요? 저는 처음으로 봤는데 그게 항우울제 광고라는게 참 충격적이더라구요. 알고 계셨다면 더 놀라셨을 것 같아요. 광고 자체만 놓고 보면 더없이 뭐랄까 상업광고가 아니라 공익광고 같은 느낌이라서요.

마녀고양이 2010-02-12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샀는데, 아직 못 읽었어여..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때, 우리나라는 심리 상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져. 외국도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더 약으로 해결을 보려해여,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결국 이 약들은 호르몬제잖아여? 그래서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빨리 읽어야지

blanca 2010-02-12 16:5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좋아하실 것 같아요. 참, 댓글에 쓰려다가 상담대학교 합격 정말 축하드려요! 약물 치료가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또 약물치료와 심리치료가 사려깊게 병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예민하고 중요한 부분이라 뭐라고 말하기는 참 망설여지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Kitty 2010-02-1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단순한 O형 인간이지만 이 분야에는 좀 관심이 있어서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뺐다하고 있는데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blanca 2010-02-17 12:28   좋아요 0 | URL
제 친구 대부분이 O형인데. 저는 악명높은 ㅋㅋㅋ B형이랍니다. 키티님, 이 책 저도 오래 망설이다 하이드님 서재에서 보고 자꾸 눈에 밟혀 사고 말았답니다. 한 권쯤 두고 읽어도 괜찮을 만큼 내용이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