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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리뷰도 두괄식이 좋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나 직장 출퇴근길에 시간 때우기용으로 이 책을 골랐다면,
그것은 명백한 실수다. 연인의 귀여운 익살도 시한이 촉박한 업무도 갑자기 더없이 진부하고 사소한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한 번 펼치면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다. 작품성 같은 진지한 얘기는 집어치우더라도
정말 너무 재미있어서 되레 뒷장이 얼마나 남았나 아쉬워하며 자꾸 확인하게 된다.
에밀 아자르는 로맹가리다. 자기 자신에 싫증나 있던 위대한 로맹가리가 또다른 분신을 세상에 내어놓고
시침을 뚝 떼고 사후에야 알게 한 것은 세상에 대한 완벽한 조롱이 아니라 다급한 자기 위로였다고 해두자.
그는 사람들이 작가에게 만들어 준 그 얼굴이 그렇게도 싫었다고 하니. 사실 나는 로맹가리를 잘 모른다.
이름이 발음하면 저도 모르게 쫙쫙 달라붙어 건망증을 이길 정도여서 기억해 둔 정도다.
그가 필명 에밀 아자르를 썼다는 것도 주워들은 얘기다. 프랑스 영화, 소설에 대한 묘한 두려움이 있어 그의 책을
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다 이름이 아무리 해도 잊어지지 않아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모모. 창녀의 아이. 로자아줌마. 창녀였다 쇠락하고 외로워서 살찐 육체로 동지(창녀)들의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유태인 여자. 맞다. 그녀는 정말 7층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고통과 병마에 버려져도 괜찮은 그런 여자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괜찮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안괜찮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둘의 슬프지만 익살스러운 이야기.
성장소설의 구도는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잔망스러운 아이와 그 아이에게 속아주는 서글프고 설익고 늙은 어른과의
특별한 감정들. 그 결 사이로 스며드는 시간에 침식당하며 외로워지는 인생에 대한 통찰들.
그런 도식 속에서도 이 작품이 유독 돌올한 것은 소외된 인간군상에 대한 섬세한 형상화와 생 그 자체에 대한 묘한
애정들이 뿜어내는 웃음들 때문일 거다.
모모는 프랑스에 사는 아랍아이다. 그의 엄마도 창녀고 그의 아빠는 그녀를 질투로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갇힌다.
그녀를 돌보아 주는 로자 아줌마는 독일유태인 수용소에 갇힌 경험이 있는 유태인 노인이다.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그런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이웃룰라아줌마는
세네갈 태생에 여장남자다. 모두 세속적인 시선으로 한없이 비난받고 소외받는 자격요건이다.
이방인들. 노인들. 그리고 여장남자. 주류에서 비틀어져 사각지대로 밀려난 그네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은
눈물겹고 아름답다. 그들에게도 행복할 필요가 그럴 권리가 있다는 그 당연한 명제가 불편하게 여겨졌던 그 오만한
관성은 여기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 꽉 끌어안아야 한다.
로자 아주머니의 곁에서 그녀가 숨을 멈추고도 사흘을 함께 지냈던 모모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p.307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