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에 뒤뚱거리며 집근처 도서관에 출근도장찍던 시절.
박완서의 책을 들고 근처 백화점 지하식당에서 배식을ㅋㅋ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 풀썩 자리를 튼 50대의 아주머니가 그 책에 안광을 철하고 있었다.
자못 민망해져 갈 찰나 아주머니는 "저, 책좀 볼까요? 제가 박완서를 좋아해서." 하며 나에게서 책을 건네 받았다.
그녀는 이리저리 앞표지 뒷표지도 검사하고 책 속도 한 번 후루룩 넘겨보고 아쉬운 듯 다시 그 책을 돌려주었다.
본론은 그게 아니라 갑자기 그 배경음악 같은 웅성거림을 뚫고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식당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며 포효하면서 펼쳐졌다. 그 떼는 아이란 다 그런거지,라고 용인하고 보아넘겨 줄 수준을 훌쩍 넘는 것이었다. 모두가 너무 놀라서 그 뒹굴면서 파닥거리는 그 어린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할 만한 강도였다.
엄마는 그 아이를 통제하지 못해서 어쩔줄 몰라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이를 대면할 시간을 얼마 안 남긴 나로서는
그 아이가 아주 유난히 버릇이 잘못 든 극단적인 경우인 줄 알았다. 그리고 내 배 속에서는 아주 예쁜 순둥이가 귀여운
물방울 놀이를 하고 있을 거라고 안위하며 이기적인 구경꾼을 자처했다.
문학적 감성을 잃지 않았다는 듯 책에 안광을 철하던 그녀의 안광은 그 아이와 젊은 엄마를 두루두루 성찰한 후
이윽고 나에게 다시 와 꽂혔다. 입술근육을 실룩거리며 "왜저래? 왜 저렇게 냅둬? 참나!"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은 타인의 곤란한 상황에 대한 철저한 변경의 냉랭함으로 이미 치환되어 있었다.
그녀의 강한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에 건성으로 대꾸하고 그 장면은 나의 기억 뒤켠으로 스며갔다.
나의 아이가 그 여자아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오랜만의 외식후 식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주차된 차가 비집고 나올 틈을 기다려야 하는 이상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나의 아이는 갑자기 부츠를 신고 대기실 의자로 올라가려고 버둥거렸다.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나의 저지는 약효가 없었고 아이의 비명은 더욱 강도를 더해갔다.
울고 싶어질 찰나. 내 옆에서 잔잔하고 근엄한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구원처럼 흘러나왔다.
의자에 올라가려면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지.
너 참 예쁘구나.(빈말이겠지만 ㅋㅋ)
당근과 채찍의 이 절묘한 조화라니. 그는 분명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분명하다.
그 두 마디에 딸아이는 갑자기 온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냥 멀찌거니 구경하지도, 그렇다고 배려없는 참견도 아닌 그의 따뜻한 개입은 뭉클했고
무언가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치유되지 않은 외상까지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때의 냉랭한 구경꾼이자 공모자였던 아줌마와 나를 기억하게 된다.
거창한 연대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비난받을 만한 연대를 한 셈이 됐지만
그 자리에서 침묵하고 그 곤란한 상황을 관망하고 심지어 약간 즐기기도 했을 우리들과
떼쓰는 아이를 저지해 보려 너그러운 개입을 시도한 그 남자의 차이가 주는 간극이 나를 가르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