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까지 다 읽어 버렸다. 고로. 또 책을 지를 시점이 왔다. 리뷰는 오늘 쓰고.
대중의 무서운 관음증이 도덕적 타락과 연결되는 지점을 체험했다.
아이가 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안구하더라. 도와주지도 않더라. 심지어 구경까지.
예전 미국에서 백주 길거리에서 한 여성이 칼부림을 당하며 울부짖는데 단 한 명도 신고조차 해주려는 생각도 않고
멀찍이 구경하다 그 희생자가 죽고 말았다는 사건을 읽은 기억이 오버랩된다.
게다가 수전 언니의 '타인의 고통'까지 공교롭게
이 시점에 오니 대중의 관음증과 '누군가 나대신 하겠지'라는 책임 떠넘김이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에 대한 기대는 폐기된다.
어쩌면 파충류의 변연계 뇌만 남아서 팔딱이는 지도.
자신이 물에 빠지거나 아주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미디어에서처럼 정의의 사도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할 거라는
환상은 버려라. 나부터도 그래야 겠다. 구경 대상이 안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본 지하철 선로에서 취객을 구하다 숨진 고이수현씨와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갔다 민첩하게 중간지점에 몸을 엎드린 김대현 군이 극복한
그 지점에의 경의는 지금 나의 몸 속으로 그 어느 때보다 팔딱이며 들어오고 있다. 단순한 미디어가 전하는 이미지상으로
간접적으로 느꼈던 그들에 대한 그저 '대단하군.' 정도의 찬사는 비로소 생명의 숨결을 얻은 셈이다.
그들은 충분히 훌 륭 했 다 고 마음 속으로 진심으로 외친다.
왜냐하면 다수의, 대중의 습성을, 그들은 그 망설임의 지점을 넘어버려 부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