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고, 우선 그녀의 현란한 문체에 앞서 다방면에 걸친 독서량과 그 책을 적절하게 일상에 접목시키는 능력에 감탄했었다. 지나치게 자의식이 강하고 그녀의 문체가 거북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닥 동의하지 않았으나......
이 책을 보면 그녀의 문장은 지나치게 유려하려 애쓴 기미가 군데군데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순간 순간 거북함이 밀려온다. 쉽게 써도 될 말을 이중 삼중으로 꼬아 길게 늘이는 것, 큰 상관 관계가 없는 상황을 단순히 연결시켜 현란한 비유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등 물론 전적인 나의 의견이므로 이것으로 그녀의 장점인 독서의 깊이와 넓이, 지적 소양 등을 훼손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느낌이 그랬다는 것. 또한 이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는 것인지, 그냥 한 대목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 인용한 것인지를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점도 아쉽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추천도서목록을 작성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듯.
일단 책 표지 및 제본 상태가 참 이쁘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나는 그냥 행복했다. 판형도 날씬하고 작고 표지의 아름다운 여인네의 다리와 하늘색 배경은 아기자기한 어여쁨을 발산한다.
그녀의 덕택에 물론 김연수도 강추했지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게 되었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우회와 지연의 행성' 아, 정말 너무 마음에 드는 단어들. 우회와 지연. 우회와 지연. 이런 단어가 왜 이제야 나에게 왔지? 사족이지만 토성의 하늘은 연분홍빛이란다! 아. 쓰러진다.
다음은 배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에서.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내가 요즘 느끼는 바로 '그것'이 '이것'이다. 나중의 것에서 이전의 것을 만나는 것. 그 묘한 지점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체감하며 가슴을 두드린다. 나도 더 리더를 읽었는데 이 대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저자는 이렇게 오감이 깨인 독서를 하니 훌륭하달 수밖에....누구나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을 잘근잘근 씹어 내 피와 살이 되어 흐르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런 무의미한 것 같은 독서 속에 알게 모르게 지적인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좀 빈약한 변명으로 들린다.
그리고 '보르헤스' 말년에 눈이 멀어가지나 국립도서관 관장이 된 것을 가장 큰 영예로 여긴 사람. 그.
내게는 수많은 나쁜 일과 몇 개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모든 것, 특히 나쁜 일이 장기적으로 글로 변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다른 것으로 변환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니까요.
이것도 내가 요즘 생각만 하고 짧은 문장력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 글은 삶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작가의 인생은 파란만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 단조롭고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산 작가의 작품은 그 역시 단조로운 서사 구조를 숨기려 동원한 언어유희의 망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는 점.
'현재란 미래가 과거로 허물어져가는 순간'(보르헤스가 자주 인용했던 브라우닌의 시구)
현재를 '선물'이라는 영어 단어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재정의에 이처럼 충실한 반기를 들 수 있는 아름다운 표현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다음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고독해지는 이유는 타인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는, 즉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
내가 자주 처하는 상황.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남의 판단 안에 나를 가두고. 그래서 삶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 책은 수많은 인용과 수많은 작가의 직간접 경험이 어우러져 달콤한 변주곡을 들려주는 조금은 어려운 선율 같다. 다만 그 음악에는 너무나 많은 기교가 얽혀 있고 그 기교가 조금은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숨어 들어갈 여지가 있다는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