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덕일은 '조선왕조독살사건'으로 처음 만나고, 한비야씨가 그녀의 저서에서 추천했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과  조우했다가 2권을 읽기도 전에 불현듯 그가 쓴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일단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도세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기에, 이 책과의 만남은 당연한 수순이 아닐 수 없었다. 흐릿한 기억에 의존해 보자면, 정비석의 '혜경궁 홍씨'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그 책을 필두로 하여 '한중록'까지 더해 철저히 사도세자는 무인기질이 있는 정신이상자로, 혜경궁 홍씨는 갸륵하고도 한많은 여인네로 형상화하여 내면화해왔다. 당시에는 당파싸움에 촛점을 두고 사도세자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듯 싶다. '하늘아, 하늘아!'라는 드라마도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당시 학계와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던 듯, 깜찍한 이재은의 아역을 내세워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만 상황을 왜곡해서 조명했다. 최근 들어 귀동냥으로 한중록이 어느 정도 편파적이고 감정적이라는 것, 사도세자가 정신이상자로서만 평가받는 것은 엄연한 전인격적 평가에 반하는 왜곡이라는 것, 또 영정조 시대의 치열한 당파싸움의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등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은 왔고, 어느 정도 사도세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 한계 및 정신이상설을 완전히 배제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근거 미약 등이 노출된다. 

 일단 영조시대부터 한마디로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신하들이 주군의 말을 징하게도 안들어먹기 시작한 것이 이 책에서도 계속 나온다. 예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 책에서도 정조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끊임없이 올라오는 상소때문에 독자인 내가 다 흥분하고 신경질을 냈던 기억이 있다. '택군'의 개념, 자기 당파의 사리사략에 의하여 임금의 전교까지 정면에서 거부하는 신하들의 모습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정치라는 것이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면전의 이익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그것에 반하면 상대파를 완전히 제거 축출해야 하는 그들의 그 악성은 사실 낯선 것만은 아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이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 굴레에 갇혀 타인을 향해 과도한 분노를 투사하게 된다. 영조가 그랬다. 삼종의 혈맥 같은 소리하면서 끊임없이 신하들 앞에서 양위소동을 벌이며 눈물을 보이기도 하는 등, 상당히 연극 배우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아무리 당론에 얽매이고, 아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해도 뒤주에 아들을 가두고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사초로는 알 수 없는 또다른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사도세자가 죽기 몇 해 전부터 기행을 일삼고, (상당부분이 왜곡되었다 해도), 여승을 궐안으로 들이고 사람을 죽여낸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작가도 사도세자가 기행을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그것은 그것이라고 그냥 흘려버리는 듯한 인상이다. 혜경궁 홍씨에 대하여 부정적인 감정이 전제되어 있다는 인상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나도 그녀가 상당히 얄밉지만,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에서 출발하면 아무래도 객관적 서술이 부족해 지는 것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이다. 

 정조...나는 세종과 정조가 참 좋다. 이런 지도자의 백성이 되고프다 ㅋㅋㅋ 군주의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애민이 무엇인지를 이론이 아닌 실제로 보여준 이 두 성군은 아무리 알아도 배가 고프다. 알면 알수록 더욱 놀랍고 경탄해 마지 않게 된다. 왕권시대에서 세습이라는 것이 결단코 망조만은 아님을, 성군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세종과는 달리 정조는 한편 감정적으로 참 연민이 간다. 아버지가 뒤주에 갖혀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소년세손, 살려달라고 할애비한테 간청까지 해야 했던 그 비극적 장면에서는 가슴이 아린다. 후반부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등극하는 장면이라든지..그 처연한 과거와 대비되는 사도세자 시신을 이장하는 화성 능행의 그 화려함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눈물이 절로 쏟아졌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도세자 생각 때문에 베갯머리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는 정조...젊은 나이에 원한 바도 다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떠나버린 그의 최후 등은 현실이 더 드라마틱하다는 것의 예증이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며, 남편을 죽인 친정을 등에 업고 가야 하는 어머니를 섬겨야 하는 그의 딜레마는 그의 슬픈 최후까지 그의 가슴에 화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했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현재진행형이다. 그가 얼마나 원통하고 할 얘기가 많을 지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아직도 황천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파싸움과 시류에 반하는 정치관을 가졌을 때 어떤 역습을 받을 수 있는지를 그는 피울음으로 토해 내고 있다. 나는 뒤주 속에 갖혀 물한모금 못 마시며 부왕을 원망하고 세상을 성토했을 그의 최후의 여드레가 구곡간장이 에일 정도로 아프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생사까지 관장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원형의 밑바닥인가...그래서 이 책은 너무 좋지만 너무 아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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