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는 마지막 장면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속 레빈이 그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노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유한함에 대하여 사색하는 대목, 제임스 조이스 <사자>의 주인공 아내가 십 대 시절 자신을 빗속에서 기다리다 죽은 소년을 떠올리며 오열하는 장면. 이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순간 바로 나는 레빈의 시선으로 광활한 대지에서 노동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내 존재의 미소함을 떠올리게 되고, 남편을 따라 간 파티에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몰고 온, 십대 시절 떠나보낸 첫사랑의 추억으로 울먹이는 여인의 그 먹먹한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모두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한데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감각적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마법과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바깥의 이야기와 통합되는 순간, 그 서사는 내 안으로 스며들어 녹는다. 이후 어쩌면 그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는 순간, 그 이야기는 나의 것처럼 숙성되어 새로운 서사로 변환될지도 모른다. 나의 것으로 여기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어디에선가 들어와 흡수된 것.


















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와 소설가 보르헤스는 우리가 가진 이 거대하고 끈질긴 '자아라는 감각'의 허구성을 간파한다. 우리는 과거의 자기 자신과 현재의 자신, 미래의 자아에 대하여 어떤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정한다. '나'라는 감각은 살아가는 데 있어 거의 절대적이다.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그건 내가 의존했던 세계가 붕괴되는 충격이다. 어차피 죽음 앞에서 해체될 자아 감각에 우리는 왜 이토록 집착하게 되는 걸까.


그것은 마치 우리가 끊임없이 갱신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의 화자에 대한 통일성 강박으로까지 보인다. 사춘기의 나, 청년 시절의 나, 지금의 나, 노년의 나가 다 각각 분리되어 공중에서 떠돈다면 우리는 마치 다중 화자로 난삽한 소설을 읽으며 길을 잃은 듯한 심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 누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겠는가? 아마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것이 맞다,고 그레고리 번스는 본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다 각각 떨어져서 존재하는 하나의 허구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편의에 의해,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나를 달래기 위해 그런 절대적인 자아 개념에 얽매이는지도 모른다. 일관된 내가 영원하다는 망상은 일상의 고통을 견디게 하니까.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가 한데 엮인 한편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사는 당신이 항상 같은 사람이라는 '필요한' 망상을 유지하게 한다. 

-'나'라는 착각<그레고리 번스>


심지어 현실조차 사회 구성원의 집단적으로 '공유된 망상'이라는 그의 주장은 급진적으로 들리지만 과학자의 엄정한 시선으로 본 과학적 진실이다. 실제 십 년 전 우리의 몸을 이룬 분자들과 오늘 내 몸의 분자는 같은 것이 없다. 보르헤스 또한 그러지 않았나. "어제를 살았던 사람은 오늘은 죽은 사람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은 내일이면 죽을 사람이다." 라고.


그러니 우리의 읽기는 이런 우리의 서사에 틈입하여 우리의 한정된, 편견으로 가득한 서사의 균형을 맞추고 다른 차원으로 확대된다. 단지 내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고 살다 죽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레고리 번스는 우리가 읽기를 통해 실제 감각적 체험을 하는 뇌의 부분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 내면의 서사가 변화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실제의 이야기와 허구의 그것을 우리의 뇌는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이 발견은 우리가 읽는, 듣는 이야기의 선택에도 주의를 기울어야 함을 시사한다. 나쁜 이야기는 우리는 망친다. 음식처럼. 좋은 이야기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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