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일상은 영원하지 않다. 단단하지 않다. 언제나 허물어질 수 있다. 팔자가 사나워서도 내가 특별해서도 아니다. 그건 내가 보편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퇴락하고 소멸한다. 그 유한성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빛나는 아이돌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독재자도 언젠가 반드시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예외는 없다.


그러나 이 생각을 맨날 하며 살 수는 없다. 대부분 대체로 잊고 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무언가 잠입한다.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이 바보야,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너조차. 그런데 고작 그런 걸로 고민하다니, 그러면서. 





















"카버가 카버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던 11편의 단편은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날카로운 섬광처럼 나를 찌른다. 이런 게 삶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계속 살 거야? 라고 내 어깨를 쥐고 흔든다. 


표제작인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은 유독 그렇다. 어느 날 새벽에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 그게 사건을 일으키는 건 아니다. 중년의 재혼한 부부는 그 전화에 잠이 확 깨어 뜬금없이 생의 유한성에 대해 그리고 내가 비참하게 죽을 확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때 스위치를 끌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그 고통스럽고 모두가 최후까지 유예하고 싶어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공개 토론을 마침내 벌인다. 침대 위에서. 부인은 생의 존엄만큼 죽음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옆의 남편이 기꺼이 생명유지장치의 스위치를 꺼 주기를 바라지만 남편은 다르다. 끝까지 그걸 유지해 달라고 기꺼이 비참해져도 좋으니 생의 끝까지 그 유지장치를 유지해주기를 바란다. 이 서로 다른 의견은 그러나 종국에는 같다. 


우리는 우리만큼은 끝까지 괜찮기를 바란다. 어떤 일이 닥쳐도 그렇게 금방 그런 고통스럽고 비참한 선택의 순간에 당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바람이다. 카버는 잔인하지만 그걸 끝까지 말고 나가는 작가다. 어이, 친구, 너라고 예외일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진다. 숨을 잠깐 멈춘다. 정말 하기 싫은 대답을 요하는 질문. 나는 끝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비겁하니까. 나는 진심으로 죽음이 두렵다. 그것에 관한 무언가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죽을 만큼 두렵다. 그래서 카버에게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몰라, 생각하기 싫어.


"동생에게 그 돈을 주는 게 실수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코끼리>는 이렇게 동양적 정서를 지닐 수 있을까 싶었다. 분명 그 개인주의 최선봉인 미국 작가인데 신기하게도 농경사회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그 가족 전체의 끈끈하고 도저히 분리하기 힘든 경제적 의존, 공생, 기생 관계에 대한 그 복잡한 결을 하나하나 드러내는데 정말 낯선 풍경이 아니다. 끊임없이 돈을 빌려 달라 하고 갚지 않는 실패한 동생, 나의 죄책감에 호소하며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아가는 어머니, 심지어 다 큰 성인 자식들까지 학업을 핑계로 혹은 무능한 남편을 내세워 이 성실한 육체 노동자 사내에게 들러붙어 끊임없이 돈을 달라 요구한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면 이 이야기는 그저 진부해졌을 수도 있다. 카버는 당연히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날 사내가 꾼 꿈. 꼬마가 되어 아버지의 목마를 타는 꿈. 다리는 아버지에게 감았지만 두 팔이 자유롭던 가장 이상적이었던 가족 간의 거리, 유대는 아이들이 크고 내가 늙으며 산산이 부서진다. 가족 간의 끈끈함은 위태롭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지만 내가 훨훨 날아갈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누구든 그 어느 지점에서 괴롭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어딘가로 날아갈 수 있는 지점을 카버는 알고 얘기한다. 그의 결말은 그래서 소중하다. 불가능할지라도 잠시 꿈꿀 수 있는 거기에서 아름다운 승화를 발견한다. 이건 무책임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아들 부부에게 외로움과 삶의 고통을 호소하며 끊임없이 죄책감, 부책감을 자극하는 그렇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늙은 어머니에 대한 "가슴앓이"를 보여주는 <상자들>의 결말은 현관에 불을 켜두고 들어갔다 다시 나와 끝내 그 불을 꺼버리는 이웃을 우두커니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아들의 쓸쓸한 마음의 형상화다. 


그러다 기억을 하고, 불이 꺼진다.

-레이먼드 카버 <상자들>


카버를 읽고, 불이 꺼진다. 그건 카버를 읽기 전의 소등과는 다르다. 뭔가를 보고 듣고 느낀 후의 소등은 카버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다. 더 무겁고 더 처절하지만 무의미하지 않은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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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23-01-09 18:30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thkang1001 2023-01-07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blanca 2023-01-09 18: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