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2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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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미와 뼈대가 있는 소설이 내 소원"이라는 박완서 작가의 말이 여실히 증명된 작품인 것 같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정도로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속악함과 가부장제도의 그 주도면밀한 세뇌성을 다층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라 묵직하다. 서문에 인용한 전경자의 <꿈>에 나온 아득한 옛날 왕뱀한테 반한 새끼여우가 마침내 왕뱀을 찾아 땅으로 내려간 날, 공교롭게도 왕뱀은 용 되어 하늘로 오르던 날이었다는 우화 같은 시가 애틋하게도 여운이 길어 한참 머뭇대다 드디어 의사 심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광과 현금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갔다. 


심영빈은 초등 시절 동창 현금을 두고 친구 광과 묘한 애정 다툼을 벌인다. 사춘기에 들어서며 현금에 대해 느낀 은밀한 사랑은그녀의 집 앞에 피어 있던 능소화로 환기된다. 결국 이 짝사랑은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우연히 재회하게 된 현금과의 외도로 귀결된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재벌가에 시집간 나이 차 많은 여동생 영묘의 오빠, 홀로 세 남매를 키워내고 며느리에게 이런 저런 유세를 떠는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한 영빈은 이 모든 책임의 갑옷을 은밀하게 벗어 던지고 현금이라는 여자 앞에서만은 하염없이 욕망하고 설레고 허무해한다. 


불빛을 볼 때마다 가슴이 후둑후둑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곤 했다. 곁에 있어도 한강만큼의 거리가 느껴지는 만큼, 헤어져 있어도 예민한 현 같은 게 당겨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 그 소통의 끈은 미세한 바람에도 오묘하게 떨릴 것처럼 긴장돼 있었고, 영빈은 그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때 살아 있음의 번뇌와 희열을 오싹하니 실감하곤 했다.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둘의 사랑이 중심 이야기는 아니다. 뼈대는 오히려 동생 영묘의 남편, 영빈의 매제 송경호의 때이른 죽음이다. 재벌가의 후계자였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폐암 진단을 받은 사실은커녕 죽음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모른 체 두 어린 아이와 젊은 아내를 남기고 눈을 뜨고 죽게 된다. 투병 과정, 죽음, 장례식도 하나의 전시 효과처럼 전시되고 사후 유언조차 남길 기회를 박탈하는 재벌가의 추악한 작태를 목도하게 되는 심영빈은 물질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생명을 하찮게 폄하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자본주의의의 폐해는 추상이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집안에서 한 사람의 생의 서사를 무참히 파괴해버리는 박완서의 서사는 현실의 요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며 결국 잃게 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심영빈은 자신의 어머니까지 모시며 맞벌이를 한 아내를 두고 외도를 했다는 점, 아내가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낙태를 하고 늦은 나이에 아들을 가지겠다는 일념으로 동창 광의 병원까지 찾아가게 한 가부장제의 방관자였다는 점에서는 분명 비난 받을 여지가 많은 주인공이다. 박완서는 여동생 영묘의 시가의 작태로는 물질만능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심영빈의 유약하고 자기합리주의의 뻔뻔함으로는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병폐를 드러냄으로써 이중의 뼈대를 갖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어쩌면 그 중간의 그물에 걸린 심영빈은 두 제도의 포로이자 은밀한 공모자로서 역할 했는지도 모르고 그 모습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 출간된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의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서야 전경자의 시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아, 하루가 하루가 아니던 그 옛날"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걸어왔나. 여전히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땅으로 추락하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은 그 타이밍을 기가 차게 파악하고 승천해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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