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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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인 엄마와 대만인 엄마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던 몇 년 전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의 우리는 대의나 이념과 멀었다. 같이 아이를 키우고 하루하루를 사는 일들로 교감할 때 국경이나 지도자들이 내건 어떤 명분들은 무력했다. 그러나 이것과 무관하게 역사적 현실에서 개개인들은 평온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무고한 이들이 이유도 모르는 채 하루아침에 자신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가족이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역사와 개인은 영원히 길항한다.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는 대만 태생의 일본 작가의 이러한 역사 속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예치우성이 할아버지 예준린이 젊은 시절 중국 마을의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한 현장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되는 이야기는 한 개인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저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그 폭력적 우연성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고 그러한 역사적 부책감을 짊어진 소년의 성장 과정에서의 소망, 꿈의 좌절과 회복에 대한 생생한 서사이기도 하다. 같은 민족이 이념 분쟁하에 영토가 분할되고 서로 적대하게 되는 과정은 우리나라의 그것과도 많이 닮았다. 노인들이 고향을 두고 떠나와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들의 마음을 묘사한 대목도 그러하다. 대만의 역사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런 면에서 많은 대목들을 공감하며 우리의 상황을 투영하여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 예치우성의 할아버지는 살해 당한다. 그 범인을 손자가 추적하는 큰 스토리는 그러나 이야기 자체의 핵심 동력은 아니다. 그보다는 거친 친구들과 어울려 청춘을 소모하고 첫사랑에 실패하는 예치우성의 이야기들이 7~80년대의 대만의 거리 풍경의 생생한 묘사와 어우러져 거리의 소음이 들리고 대만 음식들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친구들끼리 분신사바를 하며 영혼을 불러내는 그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은 환상적인 감각적 즐거움이 컸다. 비장한 정치적, 역사적 이야기들을 무겁게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개인이 역사 속에 그려내는 현실적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가 특유의 문체가 매력적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란 어렵고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개인의 일상을 넘어서서 다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그 간단한 진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하고 장엄한 이념, 명분을 두고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예치우성이 본인을 아낌 없이 사랑해줬던 할아버지와 입양된 삼촌의 진실을 찾아낸다고 해서 예치우성의 어린 시절의 따뜻한 추억들이 퇴색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진실을 알아내는 것과 착각한 현실의 가치는 어쩌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라고 믿고 살았던 시간들이 가족적 진실일 수도 있다. 


물고기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속에서 살기에

당신에게는 내 눈물이 보이지 않아요.

_왕쉬안, <물고기가 묻다>


이 책의 제사에 인용되어 있는 물고기의 눈물은 우리 모두가 역사 속에서 흘리는 고통의 신음이다.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느라 묻혀 버리는 숱한 개개인들의 삶의 이야기에 빛을 비춘 <류>는 결국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의 가치를 일깨운다. 할아버지와 삼촌의 이야기를 찾아 중국을 방문하는 예치우성이 찾아낸 답이 결국 그의 삶에 던져준 교훈은 그런 것이다. 


열일곱 살의 예치우성은 첫사랑에 실패하고 첫결혼에 실패하고 첫아이를 잃게 되는 현재 시점에서 회고되지만 그러한 미래를 품고도 희망을 품으며 끝맺는다. 그것은 손쉬운 자기기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기대하며 사는 삶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이다. 마침표를 알고 회고하는 과거가 가지는 가치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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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2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12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2-08-15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은데
도서관에서 인기 신간이라
너에게는 순서가 오질 않네요...

blanca 2022-08-16 11:25   좋아요 1 | URL
저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사 버린 다음날 바로 도서관에 신간 구입해서 눈앞에 꽂혀 있더라고요. 조금 더 기다릴걸 하다 책이 좋아서 소장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