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가 내려다 보이는 집에서 산 적이 있다. 쉬는 시간, 점심 시간만 되면 시계처럼 남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 거의 포효 수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바깥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운동장에 드러눕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무슨 대단한 축제라도 벌어진 양 비명을 지르고 엎어지고 웃고...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절로 웃음이 났다. 아직 이 아이들은 어른이 아니구나.


그런데 어제의 눈은 다르게 다가왔다.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럽다,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면 골절이다, 라는 이 재미없는 명제에 집착해서 조심조심 땅을 딛고 가느라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됐다.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의 낭만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춥고 힘들다,는 생각만 가지고 더듬더듬 길 위를 다니는 내 모습이 참.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싶었다. 눈이 오면 신나서 막 환호성을 지르던 시간은 벌써 저만치 물러가고. 
















소설가 이상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정지돈 작가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인데 호기심에 검색해 보니 2011년 <중추완월>이라는 작품으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고 나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전형적이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설의 방식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대단한 작품이었다,라는 게 중론이다.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단편과도 달랐고 압도적으로 좋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잉여와 부족함을 모두 발라 본질만 남긴 것처럼 명료하다. 장소도 시간도 특정되지 않은 곳에서 살인과 시체의 처분이 일어난다. 과거의 기억과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박탈 당한 주인공이 '손'과 나누는 교감은 경악스럽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다. 읽기 편한 이야기는 아닌데 그 불편함이 단순히 자극적인 말초적 감각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여운이 길다.


"어차피 우리는 갈 곳이 없잖아."라는 주인공의 독백, 대화에 절로 숨이 멈춰졌다. 중추절, 갈 곳도 불러주는 곳도 없는 그 틈새에서 타인의 손과 나누는 유대라니...

















카렐 차페크의 인생은 길지 않았다. 그는 노년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의 앎은 그래서 중년에서 머물렀을까? 아니면 그 너머로 더 빨리 단시간에 뻗었을까. 후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막연하게 자주 생각했던 한 인간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하여 다각도로 다면적으로 접근한 이야기. 평범하고 성실한 한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군상들이 모여 있는지 형상화한 대목들. 애거서 크리스티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늘의 의인이 내일의 좀도둑이 될 수도 있는 게 인간이라고.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과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쉽게 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인생은 결코 정합적이고 일관된 스토리라인으로 구성할 수 있는 손쉬운 글감이 될 수 없다. 그 모순과 어그러짐 자체가 생명의 역동성이다. 
















철학자 존 캐그가 윌리엄 제임스의 "실존적 생명 구조법"을 알려주고자 한 책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로서의 제임스의 이야기들은 제임스의 삶과 저자 캐그의 삶과 독자의 삶을 한데 모아 비로소 이해된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집은 대리석으로 지은 숭배의 장소가 아니라 거주하면서 세계와 만나는 장소다.

-존 캐드 <아픈 영혼을 위한 철학>


나의 경험의 틀 안에서 실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실재는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나 무용한 것이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제 경험하며 정립한 나만의 그것은 오늘 기꺼이 다른 경험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 그 가변적인 지점을 인정할 때 삶은 무의미에서 벗어난다. 내가 진리라 믿었던 것들이 붕괴된다고 해서 바로 무의미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제임스도 캐그도 예기치 않았던 삶의 난관을 통과하며 그들 자신의 절대적이었던 가치들을 수정하고 보완하며 나아갔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신선하다. 나날이 개선된다. 그 믿음이야말로 윌리엄 제임스가 시종일관 잃지 않았던 인생에 대한 낙관이다. 


그러니 내리는 눈은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꼭 눈싸움을 하거나 거기 위에서 구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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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2-10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lanca 2022-02-11 08:47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